[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바램이 간절해지면 무엇이든 시도를 하고 본다. 절실함이 표현되어 자신의 바램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기대하고 그것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 의미로 딸아이는 내게 소원 팔찌를 만들어 주었다. 다양한 색에서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 색을 섞어서 어떤 것은 매듭으로 또 어떤 것은 단순하게 하나로 묶어서 만든다. 보기에는 단순한 작업 같은데, 혼자 시도하더니 몇 번을 되풀이하고 금방 지쳐한다. 본인이 하는 매듭은 처음이라 쉽지 않은 모양이다. 처음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쉽지 않았다. 대신
1905년 11월 15일 서울 정동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독대한 고종은 이토의 말을 듣고 난 뒤 갑자기 사정 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고종 : 사명의 취지는 짐이 양해한다. 대외관계 위임에 관한 일은 결코 그것을 거부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귀국은 그 내용의 실질을 취하고, 우리에게는 그 형식의 명분을 보존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토 : 형식이란 무슨 뜻인가요? 고종 : 서신 왕래의 일과 같은 것이다. 이토 : 무릇 외교에는 형식과 내용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제 이 책안 (策案)은 확고하여 움직일
이토는 ‘한국은 어떻게 해서 오늘에 생존할 수 있었는지, 또한 한국의 독립은 누구 덕택이었는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때 고종이 갑자기 끼어들면서 “그 점에 대하여는 짐도 잘 알고 있다. 1885년의 천진조약(天津條約),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립을 명확히 한 것은 완전히 일본의 힘에 의한 것으로서 실로 경(이토)의 다대한 노력에 힘입은 바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종은 ‘조선이 독립국가가 된 것은 완전히 일본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한 발언은 치명적 실수였다. 이는 1904년 8월의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된 지 두 달 정도 된 11월 2일에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메이지 천황의 부름을 받았다. 메이지 천황은 이토를 대한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했다. 이토는 메이지 천황의 친서를 가지고 11월 8일 오후 5시에 부산에 도착했다. 9일 오전에 이토는 대한제국 황실이 마련한 궁정 열차를 타고 경성으로 향했다. 오후 6시 20분 경성역에 도착한 이토는 정동의 손탁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그런데 11월 5일에 송병준이 주도한 일진회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1905년 10월 2일에 앨리스 일행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떠난 후 고종은 민영환을 비롯한 몇몇 대신들과 비공식 모임을 열었다. 이 모임에선 1882년 5월 22일에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 제1관의 ‘거중조정’ 조항 즉 “만약 조약국의 어느 한쪽이 제3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경우 다른 한 국가는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을 다함으로써 우의를 표시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아울러 대한제국이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협력을 얻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고종 황제의 친서를 미국
1905년 9월 5일, 미국 사절단 80여 명은 상하이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단장인 육군장관 태프트 일행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외동딸 앨리스 일행은 북경, 대한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일정을 계속했다.1905년 9월 17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21세의 앨리스 루스벨트에 대해 소개했다.“그녀는 세계 최고국 귀한 공주다. 예사로움을 뛰어넘는 의지와 기개, 소탈하고 명랑한 자질과 깊고 고요한 학문은 일일이 논할 필요도 없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향기로운 수레가 머무는 곳과 공주가 청초하게 바라보는 곳에는 산천
1905년 1월 1일에 뤼순을 점령한 일본군은 3월에는 봉천을 점령했다. 러시아의 유일한 희망은 발틱 함대였다. 1904년 10월에 발트해를 출발한 발틱 함대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7개월 만에 대한해협에 도착했다. 전투준비를 끝낸 일본연합 함대는 1905년 5월 27-28일에 대한해협에서 발틱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순신을 가장 존경한다는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의 압승이었다. 전 세계는 경악했다. 하지만 승자인 일본이나 패자인 러시아도 전쟁을 계속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수행할 능력과 재정이 고갈되었고, 러시
주한미국공사 알렌 (1858~1932)은 21년간 한국에서 근무한 한말외교사의 산 증인이자 친한파였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때 절명 직전의 민영익을 살려내 고종의 어의(御醫)가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병원인 제중원 초대 원장이 되었다. 1887년 7월에 그는 주미전권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 워싱턴DC의 한국 공사관에서 일했다. 1890년에 조선에 돌아온 알렌은 미국공사관 서기관, 총영사, 대리 공사 등을 역임하고 1897년 7월에 전권공사가 되었다. 그는 1905년 3월 29일에 해임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1908년에
1901년 11월 27일에 고종 황제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정환덕이라는 역술가를 만났다. 그는 경상도 영양 사람으로 40세가 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자 어려서부터 공부했던 역술로 출세하고자 서울로 올라왔다. 정환덕이 역술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널리 알려지자 경운궁 전화과장(電話課長) 이재찬이 고종에게 그를 추천했다. 당시 정환덕은 나이가 40밖에 안 되었는데 머리가 백발이었다. 고종은 첫 질문으로 ‘어쩌다가 40세에 벌써 백발이 됐는지’를 물었다. 이어서 고종은 정말 알고 싶은 것을 질문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50
1904년 12월 31일에 신기선이 올린 세 번째 사직 상소는 계속된다. “백성들의 원한이 극도에 이르렀으나 하소연할 데가 없게 되었고, 그것이 처음 변란인 임술년(1862)의 소요를 초래하였고 두 번째 변란으로 갑오년(1894)의 난리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나라에서는 비로소 개혁을 도모하며 유신(維新)을 표방하였습니다.그러나 오랫동안 이루어진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고 인심은 날이 갈수록 엷어지고 있습니다. 대소 관리들은 전날보다 몇 곱절 더 제 이익만 채우며 공적인 것을 모두 잊고 폐하를 속이며 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1904년 11월 25일에 신기선은 다시 사직 상소를 올렸다. "신은 재주도 없으면서 외람되게 있지 말아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일을 일답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줄곧 녹봉만 축냈습니다. (...) 많은 재앙이 겹치고 심상치 않은 변고를 당한 때에 크게 개혁하고 크게 분발하지 않고서는 불길에 휩싸이고 물속에 빠진 것을 구출해서 소생시켜 낼 수 없는데, 지극히 어리석고 용렬하여 이미 일을 망쳐놓은 신이 구차하게 벼슬을 하고 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미 지은 죄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간 상사(喪事)를 만나
1904년 9월 2일, 신기선의 사직 상소는 계속된다.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 보건대, 뇌물을 근절하지 못하는 것은 대궐이 엄숙하고 깨끗하지 못한 때문이며, 대궐이 엄숙하고 깨끗하지 못한 것은 경연(經筵)을 오랫동안 폐지하고 정사를 직접 처결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신이 말한 경연에 대한 논의는 곧 옛사람들이 성인의 학문에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면성학(勉聖學) 세 글자는 수천 년 동안 틀에 박힌 말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싫도록 들은 것입니다. (...) 폐하께서는 갑오경장 후부터는 경연을 영영 폐지하여 버린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검둥개, 우리 집 ‘산이’가 뛰어오고 있다. 멀리서 차 소리가 나면 산이는 언제나 반가운 소리를 낸다. 하울링을 하며 우리를 맞이한다. 나는 차에서 내리면서 “산아”하고 부르면 뭉쳐진 꼬리는 태극기가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그 모습이 예쁘고 귀여워 또 이름을 부르면 금방이라도 목줄을 끊어내고 달려올 기세다. 산이는 우리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개다. 어린 강아지였을 때는 딸아이가 방안에서 잠시 키운 적도 있었다. 지금은 너무 커져서 어른 개가 되었다. 나는 산책을 갈 때면
1904년 9월 2일, 신기선의 사직 상소는 계속된다. “아!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정사가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뇌물처럼 가장 혹독한 것은 없습니다. 대저 뇌물은 무엇에 쓰이는 것입니까? 내탕고(內帑庫)에 보태어 나라의 비용을 넉넉히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까? 아! 어찌 이다지도 생각의 모자람이 심합니까? 뇌물로 벼슬을 얻은 자들은 모두 하찮은 무리들로서 나라와 백성이 무엇인지 모르니 정사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부임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며 부지런히 하는 일이란 오로지 공전(公錢)을 도적질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해서 뇌물로
1904년 7월 15일에 안종덕은 고종 정권이 ‘청렴, 근면하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으며 신뢰도 잃었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난 8월 22일에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다. 고종은 재정 고문에 일본인 메카다, 외교 고문에 미국인 스티븐스를 임명했다. 이로써 일본은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식하기에 이르렀다. 8월 28일에 철도원(鐵道院) 총재 신기선이 의정부 참정(參政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5일 후인 9월 2일에 신기선이 사직 상소를 올렸다."(전략) 현재 온몸과 터럭들까지 다 병들어 단 한 점의 살점도 성한
1904년 2월 23일에 외부대신 임시서리 이지용과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노스께 간에 6개 조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되었다. 한일의정서 제1조에는 “한일 양국 사이의 항구적이고 변함없는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東洋)의 평화를 확고히 이룩하기 위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고히 믿고 시정(施政)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고 규정하였다. 5월 말에 일본 각의는 ‘대한 방침(對韓方針)’과 ‘대한 시설강령’등을 잇따라 채택하였다. 여기에는 (1) 한국 내 일본군의 영향력 확대, (2) 재정권 장악, (3) 외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2월 23일에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일본은 4월에는 전보사와 우체총사를 접수하고 군기 누설 예방 명목으로 전보 검열을 실시했다. 5월 초순에 러일전쟁에서 승전하고 있는 일본은 고종을 압박하기 위해 궁궐 숙청을 단행했다. 내관들을 다수 파면하고 황제 알현은 대신과 협판에 한정시키는 등 고종을 근왕 세력들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고자 했다.또한 전라도·경상도·강원도 연해 어업권에 이어 전쟁 중인 일본군에 신선한 생선을 공급한다는 명목으로 평안도 · 황해도 · 충청도 3도 연해 어업권 등 각종 이권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요즘은 생겨나는 가게들이 카페들이다. 이 많은 커피 가게들은 운영이 잘되고 있는 것인지 내 것도 아닌 것에 나는 걱정을 하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잘 알아서 할 것인데 설레발을 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긍정적으로 관심의 척도이기도 하다. 커피를 좋아하는 인구는 급격히 늘었고, 그것을 수용하기 위한 장소들도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커피의 향과 마주 앉은 사람들의 스토리와 카페의 분위기가 일상이 바쁜 사람들 마음속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커피는 나이와 상관없이 이제는 전 국
안종덕의 상소는 이어진다.“외교의 경우에는 신의가 더욱 중요합니다. 항간의 보통 사람들도 신의가 없이는 교제를 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나라와 나라 간에 교제를 하는 경우야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세계가 어지러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대한제국은 피폐하여 무력과 재력을 가지고선 겨루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직 지켜야 할 것은 신의뿐인데 신의란 스스로 세우는 것입니다.돌아보건대, 우리는 삼천리 강토와 500년 왕업을 가지고 가만히 앉아 독립 자주권을 잃고 있으며, 세력을 믿고 달래며 위협하는 자들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있습니다
중추원 의관 안종덕의 상소는 신의(信義)로 이어진다. “지금 폐하께서는 신의를 좋아하지만 주변의 신하들은 속이는 것이 버릇이 되었고 중앙과 지방에서는 유언비어가 떼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애통조서(哀痛詔書)를 여러 번 내렸으나 온 나라가 감격하는 효과가 없고, 엄격한 칙서(勅書)를 자주 내렸으나 탐관오리들이 조심하는 기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신은 폐하의 신의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의가 없으면 사람의 도리가 서지 못하고 신의가 없으면 하늘의 도리가 시행되지 않습니다. 신의가 없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