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어제는 달이 청명한 가을을 닮아서 참 밝았다. 예전에 할머니가 말씀하신 토끼도 있을 것 같고 그리운 사람의 얼굴도 있어 보인다. 달의 크기는 내 마음의 크기라 했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내 마음보다는 더욱 커 보인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도 아니고 달이 어제보다 이유 없이 커져 버린 것도 아닐 텐데, 어제의 달은 유난히 밝고 컸다. 아마 가을이 보내는 사랑 때문인 것 같다. 만인의 연인이며 기다림이며 아름다움이 가을이다 보니, 우리는 가을에 더욱 감정이 솟아나는 것 같다. 가을을 만나려고 우리
1905년 12월 16일에 을사오적 즉 학부대신 이완용,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군부 대신 이근택이 장문의 변명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을 읽어보자. “ 신들이 성조(聖朝)에 죄를 짓고 공손히 천토(天討)를 기다린 날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신들이 버젓이 의정부에 있는 것은 염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국(時局)을 보건대 어찌할 수 없어서입니다.”이들은 조약을 체결하면서 반대 한 번 제대로 안 했으면서, 시국을 보건대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다니 참으로 파렴치하다.이어서 이완용 등 을사오적은 상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에 주재하던 외국 공사관은 하나 둘 철수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철수한 곳은 미국공사관이었다. 11월 24일 미국 국무부로부터 철수 통고를 받는 주한미국공사관은 11월 28일에 한국을 떠났다. 알렌 후임으로 1905년 3월 말에 임명된 미국 공사 모건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 공사 하야시와 축배를 들었는데 철수 시 고별인사 한마디 없이 떠났다. 주한미국공사관은 1882년에서 개관하여 23년 6개월 만에 철수했다.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는 이 모습을 ‘난파선에서 뛰어내리는 쥐 떼들
민영환이 자결한 다음 날인 12월 1일 특진관 조병세가 약을 먹고 순국했다. 향년 79세였다. 조병세는 가평 시골집에 추방되었으나 11월 30일에 다시 상경하여 12월 1일에 심순택, 이근명과 함께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삼가 비지(批旨)를 받아보니, ‘이렇게 번거롭게 반복하는 것은 서로 면려하고 수성(修省)하는 것만 못하니 힘쓸 것은 자강에 있다.’고 하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 신들이 집에 물러가 있다 해도 근심에 휩싸여 통탄의 눈물을 흘릴 따름이며 문을 닫고 자결할 따름입니다.
1905년 11월 28일에 시종부 무관장(侍從府 武官長) 민영환 등이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신들이 두 재상의 뒤를 따라 속히 역적들을 처단하고 강제 조약을 돌려보내는 일로 여러번 호소하였지만 아직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려 매국 역적들을 처단하고, 강직하고 충성스런 신하를 외부대신으로 임명하여, 성명을 내고 회동하여 담판하게 하소서. 그래야 강제 체결된 조약이 폐지되고 나라가 보존될 것입니다."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이미 여러 번 칙유하였
1905년 11월 26일에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 등이 외부대신 박제순 등을 참형에 처하라고 상소하였다. ”아, 노예로 유린당할 참화가 목전에 닥쳐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백성들이 도륙당할 것이니, 아! 통분합니다. 외부대신 박제순의 죄를 어떻게 다 규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일을 주관하는 대신이 되었으면 설사 폐하가 윤허하며 조인하게 한다 해도 죽기로 간쟁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신하된 직분을 다해야 옳은데 폐하의 뜻을 받들지 않고 제멋대로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만 이처럼 혹
1905년 11월 21일에 정2품 박기양이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고 외부대신 박제순을 해임하라고 상소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외부대신 박제순을 해임하기는 커녕 11월 22일에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大臣) 서리(署理) 업무까지 맡겼다. 박제순을 중용한 고종의 처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11월 23일에 원임 의정(原任議政) 조병세가 고종을 소견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경기도 가평에서 올라온 것이다. 그는 을사오적을 빨리 처단하라고 했다. 이러자 고종은 물러가서 건강이나 관리하라고 말했다.이어서
1905년 11월 21일에 는 1면에 「황성의무(皇城義務)」란 논설을 실었다.“어제 황성신문 기자가 일한신조약(日韓新條約)에 대하여 한황 폐하께서 이토 대사의 강청(强請)을 정대하고 명확하게 척절(斥絶 배척하고 거절)하신 칙어와 다수의 일본 병사가 궁궐에 난입하여 용탑(龍榻 임금이 앉고 눕는 침상)에 지척까지 다가와서 위협과 협박을 보인 행동과 이토대사가 참정대신(한규설)에게 공갈도 하고, 유세도 하는 등의 여러 가지 강압수단과 한참정이 그 조약에 날인을 하지 않은 일과 각 대신이 군부(君父)를 속이고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가을 닮은 하늘은 잔잔한 호수와 같고 그 색은 청아한 에메랄드빛을 닮아있다. 그래서인지 내 마음은 넉넉해지고 풍요로워진다. 잔잔한 바람도 콧잔등의 땀을 건드려주고 걷는 걸음마다 치맛자락이 나풀거린다. 10대 소녀의 단발머리가 생각나도록 짙은 녹색은 마지막 그들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여름 동안은 더위에 지치고 사는 것에 지쳐서 후각도 시력도 챙기지 못하다가 이 가을에 조금씩 그 기능을 회복하고 있는 것 같다. 자연이 볼 때는 간사한 인간이라고 야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쩌랴! 인간
1905년 11월 20일 월요일 새벽에 이 경성 곳곳에 배포되었다. 신문에는 주필이자 사장인 장지연(1864~1921)이 쓴 사설 ‘오늘이 목 놓아 통곡할 날이요!(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와 ‘오건조약 청체전말 五件條約 請締顚末(5조약 체결 전말)’이 함께 실렸다. 먼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사설을 읽어보자.“지난번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내한 했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자임하여 주선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 날인 1905년 11월 19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궁내부 특진관 이근명이 상소를 올렸다. "신은 어제 정부가 조약을 체결한 일에 대해 너무나 놀랍고 의심스러워 줄곧 근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입니까? 조정에 물어서 협의하여 타당하게 처리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바로 한 밤중에 대궐에서 그 누가 알까 두려워하면서 부랴부랴 회의를 열어 이렇듯 체결하여 일을 크게 그르쳤습니다. 이것은 지금 모든 사람들의 울분을 터뜨렸을 뿐 아니라 실로 천하의 영원한 죄인으로 되었으며 또 국법으로 볼 때
# 을사 5조약 1905년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1시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대한제국 측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측 하야시 공사가 조인한 늑약은 명칭도 붙이지 못했고, 조인 날짜는 11월 17일로 하였다. 1905년 11월 17일의 「고종실록」에는 을사늑약 체결 기록이 실려 있다. “한일협상 조약(韓日協商條約)이 체결되었다.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주의(利害共通主義)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이 실지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 이 목적으로 아래에 열거한 조관(條款)을 약정한다.제1조일본국 정부는
1905년 11월 17일 늦은 밤, 이토는 대신들과의 찬반 문답이 끝나자,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불러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지시를 받아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오직 참정대신과 탁지부 대신뿐이다. 찬성 6인, 반대 2인으로 가결이 되었으니 주무 대신에게 지시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調印)하도록 주청해 달라.”고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가결을 선언하자, 참정대신 한규설은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모양을 지었다. 이러자 이토가 제지하며 짜증스럽게 “어찌 울려고 합니까?”라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기억에서 벗어나 있던 가을이 내게로 들어선다. 언제나 정확한 세월의 중심에서 손님처럼 또는 친구처럼 가까이에 있었다. 무더운 여름과 싸우고 있을 때도 가을은 기억에서 멀어져 있었을 뿐 그 자리에 그렇게 서서 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변덕이 나의 소홀함이 가을을 잊고 지냈을 뿐이었다.제법 아침·저녁에는 상쾌한 바람도 있고 간혹 쌀쌀한 기운마저 감돈다. 어김없이 하나의 소홀함도 없이 계절은 그렇게 바뀌고 다른 이름으로 오고 있지만 그 변화를 굳이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냥 소리 없이
1905년 11월 17일 오후 8시에 이토 히로부미는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에서 회의를 주재하면서 여덟 대신에게 일일이 가부(可否)를 물었다. 먼저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는 반대였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법부대신 이하영이 어정쩡한 발언을 하자 이토는 찬성으로 정리했다.이어서 이토는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물었다. 이완용은 어전회의에서 자신이 한 발언을 대강 설명하고나서 말을 이어갔다. “이번 일본의 요구는 대세 상 부득이한 것이다. 종전에 우리 외교의 변화가 심했던 탓으로 일본은 두 차례나 큰 전쟁을 치렀다. 일본은 더 이
1905년 11월 17일 (금) 오후 4시경 시작된 어전회의는 7시가 넘어서 끝났다. 고종은 참정대신(총리) 한규설과 외부대신 박제순을 다시 불러 특별지시를 하였다. 잠시 후 대신들이 모두 휴게소에 모였다. 이때 하야시 일본 공사가 한규설에게 어전(御前) 회의 결과를 물었다. 한규설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지시하셨으나, 우리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거듭 말하였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하였다. 이는 중대한 협상을 앞두고 스스로 협상전략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노출시킨 꼴이다. 일본은 회유와 협박까지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숙자 문학박사] 나는 며칠째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의 정체를 파악하느라 너무나 고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건설적인 일이라서 피곤하다면 불평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전혀 그렇지 않음을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어디에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 전전긍긍하고 있다. 무엇이 화가 나고 어떤 것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구체적인 원인을 알 수 없으니 그 깊이는 끝없이 아래로 추락한다. 흔히 말하는 나이가 주는 우울함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견디고 버텨내고 있지만 지난 세월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가
1905년 11월 16일 오후 4시에 이토 히로부미는 정부 대신과 원로대신들을 자신의 숙소인 손탁호텔로 불렀다. 어제 고종이 내각과 상의하라고 했으므로 정부 대신들을 직접 설득하기 위해서였다.손탁호텔은 독일 출신 여성 손탁(孫澤, 1854∼1925)이 운영한 호텔이다. 그녀는 1885년 10월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를 따라 내한하여 25년간(1885∼1909) 한국에서 생활했다.손탁은 웨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궁내부(宮內府)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담당하면서 고종 및 민왕후와 친하였고, 고종은 1895년에 정동에 있는 한옥 한 채(현
고종은 외교권 이양은 매우 중대한 일인만큼 대신들의 의견을 묻고 백성들의 뜻도 살펴야겠다고 하면서 우회적으로 거절하였다. 이에 이토는 정부 대신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제 군주국가의 국왕이 백성들의 뜻을 살피겠다는 것은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에 저항하려는 저의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항의했다.이토 : 귀국은 전하의 친재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군주전제국이 아닙니까? 그리고 인민의 의향 운운이라 했지만 필시 이는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을 시도하려는 생각이시라 추측됩니다. 요사이 유생 무리를 선동해서 상소하게
1905년 11월 15일 서울 정동 수옥헌(지금의 덕수궁 중명전), 오후 3시 부터 시작된 고종 황제와 이토 히로부미의 단독 면담은 2시간을 넘기고 있었다.이토가 건네준 협약 초안을 몇 번이나 살펴본 고종은 이토에게 외교 형식이라도 보존해 달라고 매달렸다.고종 : 일본 정부의 충언은 결코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다만 그 형식을 어느 정도 갖추는 데 경의 알선, 진력을 기대한다. 경이 짐의 절실한 희망을 귀 황실과 정부에 전하면 다소 변통을 볼 수 있지 않을까?그러나 이토는 잔인할 정도로 냉혹하게 거절했다.이토 : 본안은 더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