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12회)-성삼문·이개·하위지·유응부,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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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12회)-성삼문·이개·하위지·유응부,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 당하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4.18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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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성삼문·이개·하위지·김문기·유응부·권자신 등을 실은 수레는 경복궁에서 광통교를 지나 처형장소인 군기감 앞(지금의 서울특별시청 자리)에 도착했다. 1)

거기에는 세조의 어명에 따라 백관(百官)들이 빙 둘러섰고, 백성들도 구경하기 위해 발 디딜 틈 없이 모였다.

군중 틈에는 단종 복위거사 실패로 성삼문·박팽년 등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 동학사에서 온 매월당 김시습(1435∼1493)도 있었다. 그는 스님 차림으로 처형 현장을 지켜보았다.

사진=서울시 군기시 터

의금부는 먼저 성삼문의 처형부터 실시했다. 형졸들은 달라붙어 성삼문의 손과 발 그리고 목을 묶어 소달구지에 걸었다. 이어서 구령에 따라 사형집행 감독이 달구지를 움직였다. 묶여 있던 성삼문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고삐 잡힌 소들도 덩달아 움직였다.

그 순간, '우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성삼문의 몸이 다섯 조각으로 찢어졌다. 피가 흥건했다. 군중들은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이개 · 하위지 · 유응부 ·김문기 · 권자신 ·성승 · 박중림 등에 대한 거열형이 집행되었다. 피가 튀기고 사지가 찢어지는 아수라장을 보고 있는 문무백관들은 숨을 조였다. 눈물이라도 훔치면 역적으로 몰릴 판이었다.

이어서 형졸들은 이미 시신이 된 박팽년 · 유성원 · 허조의 시신을 끌어내어 소에 묶고는 거열형에 처했다. 죽은 사람을 또 죽이다니. 백성들 사이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진=서울시 시민청 내 군기시 전시관

한참 후에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등의 목은 저자거리에 효수(梟首)되어 3일 동안 걸렸다. 시신도 그대로 나뒹굴어졌다. (세조실록 1456년 6월8일)

그런데 아무도 이들의 시신을 수습할 엄두를 못 냈다. 역적으로 몰릴 판이니 누가 장례를 치러주려고 했을 것인가. 그때 김시습이 나섰다. 그는 성삼문 · 박팽년 · 유응부 · 이개, 성승 등 다섯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삼았다. 그리고 다시 방랑길을 떠났다.

정조 6년(1782년)에 서울 노량진 민절서원 앞에 세워진 ‘사육신 신도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 이 다섯 묘는 이미 박(朴)· 유(兪)· 이(李)· 성(成) 이란 성씨로 표석이 세워졌으니 육신(六臣) 중 네 공(四公)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하나 성씨가 있는데 이는 성공(成公)의 아버지 `승(勝)`으로서 같은 날에 화를 입어 이곳에 묻혔다고 하며, 하공(河公)의 묘는 영남 선산에 있는데 몸의 일부만 묻혔고, 유공(柳公)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듣지 못하였다.

대체로 그 당시 화가 일어났을 때 가족까지 전부 몰살되어 제공의 시신을 거둘 사람이 없는 상황일 때에 어떤 스님이 그 시신을 업어와 이곳에 묻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매월당 김시습이 묻었다고 하는데, 그때는 사태가 다급하여 일을 제대로 격식을 차리지 못해 무덤이 서로 뒤바뀌어 어느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하공(河公)과 유공(柳公)의 무덤 또한 이 중에 섞여 있지 않은 줄을 어찌 알 것인가?

사진=서울 사육신 공원의 신도비각

한편 성삼문 · 이개 · 하위지의 아들들은 연좌제에 몰려 교형에 처해졌다. 성삼문의 세 아들 맹첨, 맹년, 맹종과 이개의 아들 공회, 유응부의 아들 사수, 권자신의 아들 구지, 허조의 아들 연령, 김문기의 아들 현석이 교형에 처해졌다. 송석동의 아들 창, 녕, 안, 태산 등 4형제와 박쟁의 아들 숭문도 죽임을 당했다. 하위지의 아들 호 ·박 ·연 ·반 4 형제는 경상도 선산 시골집에서 교형을 당했다.

또한 난신에 연좌된 부녀는 대신들의 노비가 되었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주고, 이개의 아내 가지는 우참찬 강맹경에게 주고, 하위지의 아내 귀금· 딸 목금은 권언에게 주고, 유응부의 아내 약비는 권반에게 주었다. 김문기의 아내 봉비는 도절제사 유수에게 주고, 딸 종산은 대사헌 최항에게 주었다. 성삼고의 아내 사금 및 한 살 된 딸은 밀고한 우찬성 정창손에게 주고, 권자신의 아내 어둔·딸 구덕은 권준에게 주고, 윤영손의 아내 탑이·딸 효도, 성삼성의 아내 명수는 병조참판 홍달손에게, 박대년의 아내 정수, 송석동의 아내 소사는 동지중추원사 봉석주에게 주고, 봉여해의 어미 소비·아내 정순은 상호군 유서에게 주었다.(세조실록 1456년 9월7일)

한편 밀고한 김질(1422∽1478)과 정창손(1402∽1487)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김질은 세조의 총애를 받았고 예종이 즉위한 후 좌의정, 성종 시절에도 우의정을 하였다.

사위 김질과 함께 밀고한 정창손은 1458년에 영의정이 되었고, 1475년에도 영의정을 했다. 그런데 그는 연산군의 생모를 폐출하는 논의에 참여하여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 부관참시 되었다.

1) 군기감은 1392년에 설치되었다가 1466년(세조 12)에 군기시로 개칭되었다. 서울시청 지하 시민청(지하철 시청 역)안에 「군기시유적 전시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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