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16회)- 단종, 영도교에서 정순왕후 송씨와 영영 이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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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16회)- 단종, 영도교에서 정순왕후 송씨와 영영 이별하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5.2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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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 세조, 단종에게 교지를 내리다.

1457년 6월21일 세조는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유배 보낸다. 세조의 교지(敎旨)를 읽어보자.

"전날 성삼문 등이 말하기를, 상왕(上王)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다.’ 하였으므로, 종친과 백관들이 합사(合辭)하여 말하기를, ‘상왕도 종사(宗社)에 죄를 지었으니, 편안히 서울에 거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하고, 여러 달 동안 청하여 마지않았으나, 내가 진실로 윤허하지 아니하고 처음에 먹은 마음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계속하여 인심(人心)이 안정되지 아니하고 잇달아 난(亂)을 선동하는 무리가 그치지 않으니, 내가 어찌 사사로운 은의(恩誼)로써 나라의 큰 법을 굽혀 하늘의 명과 종사의 중함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특별히 여러 사람의 의논에 따라 상왕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 거주시키니, 의식을 후(厚)하게 봉공(奉供)하여 종시(終始) 목숨을 보존하여서 나라의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오로지 너희 의정부에서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라.”

너무 속보인다. “나는 상왕을 유배 안 보려 했는데 송현수 옥사가 일어나서 종친과 대신들이 유배 보내라니 어쩔 수 없다.”

#2. 단종, 정순왕후 송씨와 영미교(永尾橋)에서 영영 이별하다.

금성대군 저택에서 교지를 받은 단종은 6월22일에 유배 길을 떠났다.

그런데 단종은 노산군 부인으로 강봉 된 정순왕후 송씨(1440∼1521)와 함께 갈 수 없었다. 죄인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1454년 1월22일에 열다섯의 나이로 한 살 아래인 단종과 혼인하였다. 결혼 생활 3년은 슬픔의 연속이었다. 1455년 윤6월11일에 수양대군이 혜빈 양씨(세종의 후궁이고 단종을 보살핌)와 금성대군을 제거하자, 겁에 질린 단종은 세조에게 양위하였다. 1년 후인 1456년 6월 사육신 사건으로 피바람이 불었고, 이제는 부친 송현수마저 역모 조작에 걸려들었으니 송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송씨는 눈물을 삼키면서 홀로 떠나는 단종을 전송하고자 광나루 터까지 따라 나섰다. 그런데 동묘에서 황학동으로 가는 영미교(永尾橋) 다리에서 호송 대장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송씨 부인에게 호령했다.

여기서 그만 돌아가시오!

노산군은 오늘 밤 안으로 양주까지 가야 하오!

휘하의 50여명의 금부 나졸들이 창을 엇갈려 세워 송씨 부인을 막았다. 1)

사진1=아래서 본 영도교

 

사진2=영도교 - 양쪽이 인도이고, 가운데가 차도이다.

두 사람은 이 다리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부인, 부디 자중자애하시오!

전하, 부디 옥체를 보존하소서!

그런데 이것이 영영 이별이었다. 단종은 4개월 후인 10월24일에 죽임을 당했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영이별 다리’라 불렀다. 문자 좋아하는 이들은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 하여 영도교(永渡橋)라 하였다. 2)

사진3=영도교 위치 표시

#3. 화양정(華陽亭)에서

부인 송씨와 이별한 단종은 황학동을 지나 광진구 화양동에 있는 화양정(華陽亭)에서 잠시 쉬었다. 3) 세조가 환관 안노(安璐)를 시켜서 노산군을 전송하기 위해 화양정에서 약간의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세조실록 1457년 6월22일)

사진4=화양정 유래 표시=화양동 주민센터 앞 공원에 있다.
사진5= 화양정 터

내시 안노는 단종에게 술을 권하며 성삼문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고 있노라고 넌지시 말했다. 세조가 혈육의 정으로 전송 연을 베푼다고 생각했던 단종은 안노의 말이 너무나 괘씸하여, 술잔을 들어 안로의 면상을 때리고 말았다. 4)

단종 일행은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내려갔다. 그리하여 6월26일에 여주의 이포나루에 내렸고 이곳부터는 육로로 영월까지 가서 마침내 6월28일에 청령포에 도착했다.

1) 단종의 유배행렬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어득해(魚得海), 군자감 정(軍資監正) 김자행(金自行)·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홍득경(洪得敬)이 이끄는 50명의 군사가 호송(護送)하였다. 이 호송에는 의금부 도사 왕방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2) 창신동에 있던 영미사(永尾寺) 승려들이 다리를 가설하였다고 하여 영미교(永尾橋)로 불렀다. 영도교는 청계천 7가와 8가 사이에 있는데 2005년에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새로 가설되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영도교에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별에 관한 표시 하나 없다는 점이다. 전태일 다리에는 많은 이야기를 적어 놓았는데...

한편 김별아의 소설 ‘영영 이별 영이별(2014년)’에는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이별이 잘 묘사되어 있다.

3) 화양정 터는 광진구 화양동 주민센터 앞에 있다. 화양정은 세종이 지은 정자인데 이 근처가 조선 태조 때 만든 말 목장이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노산군이 영월에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회행정(回行亭)이라고 불렀다.

4) 1457년 6월 22일의 세조실록에는 “임금이 환관(宦官) 안노(安璐)에게 명하여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노산군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의 역모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죄이다."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광수는 이를 거짓으로 보았다. (이광수, 단종애사, 일신서적 출판사, 1995, p 361). 필자 역시 실록을 믿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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