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21회)-단종 비 정순왕후-정업원(淨業院)에서
상태바
[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21회)-단종 비 정순왕후-정업원(淨業院)에서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6.27 09: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 서울시 숭인동 정업원에서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1440∼1521)의 흔적을 찾아서 정업원(淨業院)을 찾았다. 정업원은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靑龍寺) 옆에 있는데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정업원 옛 터에 있는 비석)’만 남아 있다.

먼저 ‘정업원 터’ 안내판부터 보았다.

“이곳은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가 궁에서 물러난 뒤 평생을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자 단종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안녕을 빌었다. 단종이 죽은 후 1521년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단종의 명복을 빌며 평생을 보냈다. (후략)”

사진=정업원 전경

정순왕후 송씨는 1457년 6월에 영도교에서 단종과 영영 이별한 뒤 폐서인되어 동대문 밖에서 살았다.

그런데 윤근수(1537∼1616)가 지은 『월정만록』에는 “단종의 비(妃) 송씨는 적몰(籍沒)되어 관비(官婢)가 되었다. 신숙주가 공신의 여종으로 받아내고자 하여 주상에게 청하기까지 하였으나 광묘(光廟 세조)는 그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고 기록되어 있다. 1)

한편 송씨는 정업원 근처 동망봉에 올라 단종이 무사하기를 아침저녁으로 빌었지만 허사였다. 단종은 영월 유배 4개월 만인 1457년 10월24일에 죽임을 당했다.

송씨는 궁을 같이 나온 세 명의 시녀가 동냥 해 온 음식으로 끼니를 이었다. 그런데 궁핍은 더했다. 이를 보다 못한 동네 아낙네들이 쌀과 푸성귀 등을 사립문 위로 던져 놓고 갔다. 하지만 보고를 받은 세조는 부녀자들이 정업원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을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이러자 동네 아낙네들은 다시 지혜를 짰다. 정업원 근처에 금남(禁男) 채소 시장을 연 것이다.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니 조정은 감시를 할 수 없었고, 여인네들은 채소 시장이 북적거리는 틈을 타서 곡식과 채소를 정업원 담 너머로 던졌다.

#2 ‘자주동샘’에서

정업원 옆에는 ‘청룡사’ 사찰이 있다. 청룡사 건너편에서 낙산 쪽으로 올라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쌍용아파트 2단지 앞에서 내렸다. 도로 건너편 정류장 근처에는 ‘자주동샘 25m’라는 이정표가 있다.

사진= 청룡사-정업원과 붙어 있다.

 

사진=‘자주동샘’ 이정표

이 표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초가집이 하나 나온다. 이 집이 바로 비우당(庇雨堂)이다. 세종 때 청백리 유관이 살았다는 집인데, 그의 외손 실학자이고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1563∼1628)이 살았다.

비우당 안쪽 바위에는 ‘자주동천’이란 암각 글씨가 새겨져 있고, 집 뒤엔 샘이 있다. 정순왕후는 이 샘에서 천에 자줏물 들이는 염색 일을 하였고, 그 천을 저자거리에 내다 팔아서 생계를 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자지동(紫芝洞)이라 부른다.

사진=담 벽에 ‘자주동천’이라고 새겨진 비우당

#3 청룡사에서 비구니로 살다.

세월이 흘러 송씨의 비참한 생활을 전해들은 세조는 정업원 근처에 영빈전이란 집을 짓고 식량을 내려 주었으나 송씨는 단호히 거절했다.

1472년(성종 3년)에 15세의 어린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한 대왕대비(1418∼1483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는 "노산군의 처 송씨에게 그 친속(親屬)들로 하여금 의식을 공급하여 살 바를 잃지 말게 하라”고 전지 했다. (성종실록 1472년 5월23일)

당시 송씨는 친족이 모두 도륙당하여 친척이 있을 리 없었다. 유일한 친척이라고는 단종의 하나 뿐인 누나 경혜공주(敬惠公主 1435∼1473)와 그녀의 외아들 정미수(1455∼1512)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송씨는 정미수를 양아들로 삼아 정(情)을 붙였을 정도였다. 2)

연산군 10년(1504년) 7월29일에 정업원이 또 훼철된다. 오고 갈 곳 없는 송씨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청룡사에서 지냈다. 그리고 1521년 6월에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 송씨는 세조 · 예종 · 성종 · 연산군 · 중종 다섯 임금의 치세를 보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연산군 시대에 일어난 무오사화 · 갑자사화도,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것도 목격했으며 1519년 기묘사화로 보았다.

중종은 송씨를 대군(大君) 부인의 예에 의해 상을 치르도록 하였고 (중종실록 1521년 6월 6일), 장례는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씨 집안에서 주도하여 해주 정씨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곳이 바로 생각 사(思)의 사릉(思陵)이다.

1698(숙종 24)년 11월 6일 단종이 복위되자 송씨도 정순(定順)왕후로 복위되었다. 순행하여 어그러짐이 없음을 정(定)이라 하고, 이치에 화합하는 것을 순(順)이라 했다.

#4. 다시 정업원에서

다시 정업원에 와서 정업원 비각을 바라본다. 비각 위에는 “앞 봉우리, 뒤의 바위 천만년을 가오리(前峰後巖於千萬年) 신묘 9월6일에 눈물 머금고 쓰다.”라는 현판이 하나 있다. 영조(1694∼1776)의 친필 글씨이다.

1771년(영조 47) 9월6일에 영조는 왕세손(훗날 정조)과 함께 정업원에 직접 납시어 이곳이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게 되었고 ‘정업원 구기’라는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하였다. 3)

사진=정업원 비각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 그녀는 죽어서도 단종을 생각하면서 외롭게 사릉(思陵)에 묻혀 있다.

1) 그런데 윤근수의 글은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인 것 같다.

2) 경혜공주의 남편은 정종인데, 정종은 1456년에 광주(光州)로 유배를 가서 1461년에 모반대역죄로 능지처사되었다.

3) 영조는 친히 ‘동망봉(東望峰)’ 세 글자를 쓰고 정업원과 마주 하고 있는 봉우리 바위에 새기도록 명했다. (영조실록 1771년 9월6일) 그런데 동망봉 바위는 일제가 이곳에 비행기 터를 닦으면서 파괴되어 없어졌다.

 

▶ 사진이나 영상의 불법촬영유포, 이를 빌미로 한 협박, 사이버 공간에서의 성적 괴롭힘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여성긴급전화 1366,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에서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뉴스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