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25회)-사육신 공원을 다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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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25회)-사육신 공원을 다시 가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7.25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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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서울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공원을 다시 갔다. 이 글을 시작할 때 방문한 이후 6개월 만이다. 사육신 묘 안내판을 보고나서 불이문(不二門)을 지나니 좌우에 ‘육각(六角)의 사육신비’와 ‘신도비각’이 있다. 앞은 의절사(義節詞) 사당이다.

사진=사육신 묘 안내판

의절사 사당에서 절을 하고 뒤에 있는 묘소부터 갔다. 묘소에는 일곱 분의 묘가 있다. 기존의 사육신 외에 김문기의 묘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보니 의절사 사당에도 일곱 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이어서 의절사 사당 좌우에 있는 ‘육각의 사육신비’와 ‘신도비각’을 보았다. ‘육각(六角)의 사육신비’부터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 유응부 · 하위지 · 류성원이 각 한 각씩 6각으로 둘러져 있다.

사진=사육신 육각비

육각비 윗부분엔 육각비를 세운 내역이 적혀 있다.

“성삼문 · 박팽년 · 류성원 · 이개 · 하위지는 집현전 학사로 유응부와 더불어 세종대왕의 높은 신망과 깊은 은총에 감명하며 장손 단종을 보익하라는 간곡하신 고명을 무른 후 세종 · 문종의 뒤를 이어 단종이 등극하시매 나이 아직 어리신지라 정성으로 임금을 돕고 섬기는 중에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뜻을 달리하여 정승 황보인 김종서 정분을 죽이고 단종을 밀어내니 때는 단기 삼천칠백팔십팔년 윤6월 세조가 왕위에 오르매 사육신 의분을 참지 못하여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지극한 형벌과 무참한 죽엄을 당하여 버린 듯이 여기 누워 그 충성과 절개 천추만세에 으뜸 되리니 이에 사육신을 추모하는 삼천만 동포의 마음 여기 모여 서울특별시 시민과 역대 시장이 뜻한 바를 김태선 시장이 이루어 지성으로 이 비가 서다. 김광섭 짓고 김충현 쓰다.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의명(依命) 단기 4287년 10월 서울특별시 건립”

단기 4287년을 서기로 환산하니 1954년이다. 그런데 사육신묘 안내판에는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 비를 세웠다’고 적혀 있어 어느 것이 맞는지 헷갈린다.

한편 사육신의 각비에는 사육신의 충절이 담긴 시가 새겨져 있다. 육각은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 유응부 · 하위지 · 류성원 순으로 각 한 각씩 둘러져 있는데 성삼문 각비에는 그 유명한 절의시가 적혀 있다.

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1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박팽년의 시조도 숙연하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 듯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아 가실 줄이 있으랴

이개의 시 또한 애잔하다.

안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가

저 촛불 나와 같아서 속타는 줄 모르더라.

사진=성삼문, 박팽년, 이개 각비

유응부는 함길도 절제사 시절에 지은 한시가 적혀있다.

將軍持節鎭夷邊

紫塞無塵士卒眠

駿馬五千嘶柳下

良鷹三百坐樓前

번역하면 이렇다.

장군이 도끼 휘둘러 변경 오랑캐 진압하니

변방엔 흙먼지 가라앉고 사졸은 편히 잠자네.

오천 필 준마들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울고

삼백 마리 날쌘 송골매가 누각 앞에 앉아 있네.

유응부는 충의가도 지었는데 ‘청구영언’에 전해진다.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진단 말가

하물며 못 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하위지의 각비에도 한시가 적혀 있다.

男兒得失古猶今

頭上分明白日臨

持贈蓑衣應有意

五湖烟雨好相尋

이 시는 하위지가 고향인 경상도 선산으로 내려가자 박팽년이 도롱이를 빌려주었다. 하위지는 그 뜻을 단종 복위 뜻으로 알아차리고 「박팽년이 도롱이를 빌려주니 화답하다」란 시를 지었다. 한글로 읽어보자.

남아의 득실이야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구나.

머리위에 밝은 달이 환히 비추는데

도롱이를 건네주는 뜻이 있을 것이라

강호에 비 내리면 즐겁게 서로 찾으리.

사진=유응부, 하위지 각비

류성원의 시도 한시인데 해석이 어렵다. 그 대신 ‘충의가’를 소개한다.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더니

문전의 수성어적(數聲漁笛)이 잠든 나를 깨워라

사진=류성원, 성삼문 각비

그런데 사육신이 충절의 아이콘이 된 것은 생육신인 추강 남효온(1454∼1492)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 기인한다. 그는 1489년에 고향 의령에서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류성원·유응부의 충절을 기리는 ‘육신전’을 집필했는데, 각종 역사 기록은 이들 여섯 사람을 ‘육신(六臣)’으로 지칭했다.

나중에 숙종이 이곳을 본 후 추숭작업을 하고 묘에 제사 지낼 것을 명하여 사육신묘가 공식화 되었고 숙종 17년 (1691)에 민절서원이 세워졌으며 1692년에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되었다. 이윽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이어서 건너편에 있는 신도비각을 보러 갔다. 그런데 비각 앞에 한글 안내판이 아예 없다. 난감하다. 별수 없이 비문 앞부분만 본다. 비의 맨 좌측에 有明朝鮮國 六臣墓碑銘 幷序(유명조선국 육신묘비명 병서)라고 적혀 있고, 좌측 아래 부분에는 大宗伯太學士趙觀彬撰(대종백 태학사 조관빈찬), 集唐顔眞卿書 (집당 안진경 서)라고 쓰여 있다.

사진=신도비각

비문은 조관빈(1691∼1757)이 짓고, 글씨는 중국 당(唐)나라 안진경(顔眞卿, 709~785)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아쉽지만 이상으로 길 위의 역사 1부- 단종애사를 마친다. 2부는 무오사화이다. 1498년(연산군 4년) 7월1일부터 7월29일까지의 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일기」를 중심으로 2부를 풀어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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