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7월11일에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모두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곳)로 들여오라."고 전교하였다. 이에 실록청 당상(實錄廳 堂上) 이극돈·유순·윤효손·안침이 함께 아뢰기를 1), "옛날부터 사초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1일)

사진=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바라본 희정당 뜰

사초(史草)란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춘추관의 기사관(史官)’들이 왕의 언행 하나하나를 기록한 시정기(時政記)다. 시정기는 임금의 일상부터 신하들과 국정 현안을 논의하는 과정, 인물에 대한 비평도 들어있는 실록의 원천자료이다.

그런데 임금을 비롯한 집권 세력은 자신들 악행이 실록에 그대로 실려 후세에 전해지는 걸 극도로 꺼렸다. 이러함에도 조선시대 초에는 사초를 빌미삼아 탄압을 가한 적은 없었고, 심지어 선대왕의 실록도 보지 못했다.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 임금도 『태종실록』을 보려했으나 편찬에 참여한 황희 등 신하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종실록 1438년 3월2일)

그런데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즉시 들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러자 실록청 당상관들은 “예로부터 사초(史草)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직필(直筆)! 이는 사실(史實)을 바르게 쓰는 일인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올바르게 기록하는 것이 사관의 길이었다. 사실을 왜곡하면서 권력에 아부하는 곡필(曲筆)은 중국 춘추전국시대부터 지탄의 대상이었다.

직필은 달리 말하면 춘추필법(春秋筆法)이기도 하다. 공자는 『춘추(春秋)』라는 노나라의 역사책을 저술하면서 객관적이고도 엄정한

비판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즉 춘추필법은 직필의 대명사였다. 2)

그러나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즉시 빠짐없이 대내로 들이라."고 재촉했다. 임금이 김일손의 사초를 보겠다는 데 감히 말대꾸이냐는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에 이극돈 등이 다시 연산군에게 아뢴다.

"여러 사관(史官)들이 드린 사초를 신 등이 보지 않는 것이 없고, 김일손의 초한 것 역시 모두 알고 있사옵니다. 신 등이 나이가 이미 늙었으므로 벼슬한 이후의 조종조(祖宗朝) 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김일손의 사초가 과연 조종조의 일에 범하여 그른 점이 있다는 것은 신들도 들어 아는 바이므로, 신들이 망령되게 여겨 감히 《실록》에 싣지 않았는데, 지금 들이라고 명령하시니 신 등은 무슨 일을 상고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임금은 스스로 사초를 보지 못하지만, 일이 만일 종묘사직에 관계가 있으면 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 등이 그 상고할 만한 곳을 절취하여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일을 고열(考閱)할 수 있고 또한 임금은 사초를 보지 않는다는 의(義)에도 합당합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1일)

김일손의 사초 전체를 안 올리고, 왕실의 능멸에 관한 부분만을 절취해서 올리겠다는 이극돈의 입장은 그의 비행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묘책이기도 했다.

연산군은 ‘가하다.’고 전교를 내렸다. 이극돈 등은 김일손의 사초에서 6조목을 절취하여 봉해 올렸다.

이어서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그 종실(宗室) 등에 관해서 쓴 것도 또한 들이라.” 하였다. 종실들의 비사(秘事)가 김일손의 사초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1) 실록청 당상 이극돈 · 유순 · 윤효손은 실록청 지관사이고, 안침은 동지관사였다. 유순(1441∼1517)은 1462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해 예문관에 들어갔다. 1470년에 홍문관부제학으로 1484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1495년에 형조판서를 하였다.

윤효손(1431~1503)은 1453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1469년(예종 1) 훈련원부정 당시 시정의 폐단을 간하다가 도리어 옥에 갇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1476년 공조참의로 승진되고 1478년 한성좌윤·한성우윤을 거쳐 경상도감사를 역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1486년 나주목사를 거쳐 1493년 형조판서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안침(1445∼1515)은 1466년에 급제하여 1481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한때 임사홍의 간사함을 폭로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임사홍이 물러난 뒤에 다시 등용되어 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494년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으로 부총관을 겸하였다.

2) 공자(BC 551∼479)가 지었다는 『춘추』에는 노나라의 은공 원년(BC 722년)부터 애공 14년 (BC 481년)에 이르는 역사가 실려 있다. 흔히 이 시대를 춘추시대라하는 것은 이 책의 이름에서 떠온 것이다.

맹자(BC 371 경∼289 경)는 공자가 『춘추』를 지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희미해져 사설(邪說)과 폭행이 일어났다. 신하로서 자신의 군주를 죽이는 자가 생기고 자식으로서 그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겼다. 공자께서 이런 세태를 두려워하여 춘추라는 역사서를 지었다. 춘추는 천자의 일을 다룬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나를 알아주는 일은 오직 춘추를 통해서 일 것이고, 나를 비난 하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 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맹자』 ‘등문공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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