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전문가칼럼
[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2부 무오사화) - 10회 연산군, 소릉에 대하여 김일손을 친국하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18.10.02 12:18
  • 댓글 0

1498년 7월12일, 연산군은 김일손에게 맨 먼저 세조와 권 귀인에 관한 일을 친국한 다음에 소릉(昭陵)에 대하여 물었다.

"전번에 상소하여 소릉을 복구하자고 청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소릉(昭陵)은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권씨의 능이다. 현덕왕후는 1441년 7월23일에 단종을 낳은 후 하루 만에 산후통으로 별세했다. 그녀의 나이 23세였다. 왕실은 9월21일에 그녀를 안산읍 와리산에 장사지냈는데, 문종은 1450년 7월1일에 현덕왕후로 추숭하고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문종실록 1450년 7월1일)

그런데 1457년 6월21일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했다. 5일 후인 6월26일에 세조는 현덕왕후 권씨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삼고 소릉(昭陵)을 폐하였다.

1495년 (연산군 1년) 5월28일에 충청도 도사 김일손은 ‘시국에 관한 시폐(時弊) 26개조’를 상소하면서 26번째 조목으로 소릉 복위를 주청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5월28일) 1)

또한 1495년 12월30일에 헌납 김일손은 대사간 김극유, 사간 이의무, 정언 한훈 · 이주와 연명으로 소릉의 복위를 헌의(獻議)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12월 30일) 2)

그러면 연산군의 친국에 대한 김일손의 답변을 읽어보자

"신이 성종 조에 급제 후 관직에 나갔으니, 소릉에 무슨 정이 있으리까. 다만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오니, 조종(祖宗)께서 왕씨(王氏)를 끊지 아니하고, 또 숭의전(崇義殿)을 지어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정몽주의 자손까지 또한 그 수령(首領)을 보전하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조정의 미덕으로서 당연히 만세에 전해야 할 것입니다. 3)

김일손은 숭의전 제사와 정몽주 후손 예우 전례에 따라 소릉 복위를 주청하였다고 아뢴다. 문종은 고려 왕씨의 후손을 예우하고 숭의전을 지어 제사를 받들게 했다. ‘국조보감 제8권, 문종조 1년(신미년, 1451)’에 나온다.

또한 태종은 정몽주를 개성 선죽교에서 죽였으나, 정몽주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증직하였고(태종실록 1401년 11월 7일), 문종은 정몽주의 증손 정윤정에게 관직을 제수(除授)했다.(문종실록 1450년 12월 8일) 성종도 1470년 3월19일에 정몽주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라고 하였다.

김일손은 이렇게 답변을 마무리한다.

“임금의 덕은 인정(仁政)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소릉(昭陵)을 복구하기를 청한 것은,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어진 정사를 행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토록 고려 왕씨와 정몽주에 대하여도 어진 덕을 베푸는데, 세조의 형수인 현덕왕후에 대하여도 인정(仁政)을 베풀 일 아닌가!

사진=성종 능 (서울 선릉)

1) 1595년 김일손의 상소 중 ‘소릉에 관한 부분’은 아래와 같다.

26. 소릉(昭陵)을 회복하소서.

우리 국가가 정히 금구(金甌)같으나 오히려 조그마한 한 결점이 있으므로 온 조정 신하들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면서 인륜이 어그러지는 중에도 태연히 지나며 스스로 지각이 없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예로부터 제왕은 사당에 신주 한 위만을 모시는 일이 없는데, 문묘는 홀로 한 위뿐입니다. 광릉(光陵)께서는 세상을 구제할 만한 계략을 쌓으셨는데, 여러 사람의 뜻에 핍박되어 선위를 받지 않으실 수 없었음은 종사를 위한 계획이오며, 그리고 소릉을 폐한 것은 광릉의 본의가 아닐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문묘가 동궁에 계실 때에 소릉에 이미 승하하셨으니 노산(魯山)을 복위하는 모계에 관련 없으심이 분명합니다. 만일 어머니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때 주모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아들은 죽였으나 딸은 용서하였으니, 여자는 외부의 일에 참섭하지 않은 때문이므로 족히 광릉의 어지신 마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송현수(宋玹壽)는 노산의 장인이건만 그 아들 송거(宋琚)와 조카 송영(宋瑛)이 이미 선왕의 용서를 입었고, 조정에 벼슬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소릉을 다시 용서할 수 없겠습니까. 비록 전하께서 원통함을 밝게 살펴서 복위하고자 하시면 의논하는 자가 반드시 조종(祖宗)의 과실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여 반대할 것이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단정코 복위하시면 장차 세종과 더불어 덕이 비등할 것이며, 문종(文宗)에게 더럽힘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조조(太祖朝)에서 왕(王)씨를 다 베어 죽이시고, 태종(太宗)께서 먼저 정몽주(鄭夢周)를 베었으니 사견(私見)으로 본다면 정몽주가 조종(祖宗)을 해칠 것을 꾀하였으니, 바로 자손의 큰 원수입니다. 그렇지만 세종(世宗)께서는 그 후예를 녹용(錄用)하여 그 절개를 권장하셨고, 또 고금의 충신(忠臣) 뒤에 열거하였으며, 문종께서는 특별히 왕씨의 후손을 구하여 숭의전(崇義殿)을 세워서 끊어진 제사를 잇게 하였으니, 세종·문종의 인덕은 천지와 같이 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뒷사람이 세종·문종을 태조인 태종의 허물을 드러냈다 하지 아니하고, 신성(神聖)하신 자손이 능히 조종의 허물을 메웠다고 하니, 어찌 거룩하지 아니합니까.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 소릉(昭陵)을 예전대로 복구하시고, 나무꾼과 소치는 사람들을 금하고, 상(喪)이 끝나면 조천(祧遷)함과 동시에 그 신주(神主)를 부(祔)하시면 일국의 강상(綱常)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연산군일기 1495년5월28일)

한편 소릉 복위를 맨 처음 주청한 이는 추강 남효온(1454∽1492)이다. 1478년 4월1일에 하늘에서 흙비[土雨]가 내리자 성종은 아랫사람에게 구언(求言)하였다. 이러자 4월15일에 성균관 유생 남효온이 소릉 복위를 주청했다. 그는 소릉 폐치로 천심도 불순하여 재앙이 내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1478년 4월15일) 그런데 이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남효온은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2) 연산(燕山) 2년(1496)에 대사간 김극뉵과 사간 이의무, 헌납 김일손, 정언 한훈ㆍ이주 등이 헌의(獻議)하여 아뢰기를, “신 등이 생각건대 문종의 원비(元妃) 권씨의 죽음이 노산 이전이었는데도 이를 동시에 폐위시켜서 문종만은 일위(一位)로 흠향하여 지금까지 배존(配尊)의 신주가 없으니 이것은 측은한 일이옵니다. 성종은 예전에 적몰한 노비들을 노산궁인(魯山宮人) 송씨(宋氏)에게 돌려주어서 그 생활을 돕게 하였고 그 일가족속까지 사하여 모두 벼슬에 나오게 하였으니 성종의 지극한 뜻을 여기서 또한 볼 수 있사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소릉묘주(昭陵廟主)를 추복하여 문종에게 배위하게 하오면 종묘에 다행일까 하옵니다.” 하였다.

이 헌의를 예조에 내리매 예조는, “예로부터 종묘에 배위 없는 독주(獨主)가 없는데도 우리 문종은 종묘에서 홀로 제향을 받으니 의리에 온당치 못합니다. 그러나 소릉을 조종에서 폐위시킨 지 이미 오래되어 경솔하게 복위하기가 어려우니 거행할 수 없습니다.”고 아뢰었다.

(연려실기술 제4권/문종조고사본말(文宗朝故事本末) 소릉의 폐위와 복위)

3) 김일손의 답변은 1495년 5월28일의 소릉 복위 상소 내용과 대동소이다. 한편 연산군은 1495년 5월 김일손의 상소에 대하여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김세곤 칼럼니스트  segon53@hanmail.net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세곤 칼럼니스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