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12일 연산군은 희정당 앞뜰에서 김일손에 대한 친국을 계속했다.

연산군 : "네가 또 악가(樂歌)에 대한 일을 썼는데, 어느 곳에서 들었느냐?"

김일손 : "비록 동요(童謠)라 할지라도 옛사람이 또한 모두 썼으므로, 신도 또한 이것까지 아울러 실었습니다. 후전곡(後殿曲)은 슬프고 촉박한 소리온데,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여 동네 아이들(街童)이나 부녀자(巷婦)라도 또한 모두 노래하였습니다.

연산군은 김일손이 후전곡의 일을 사초에 쓴 것을 친국하였다. 김일손은 비록 동요라 할지라도 옛 사람이 모두 썼으므로 아울러 썼다고 답한다. 대표적인 것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요(薯童謠)이리라. 백제 무왕이 소년시절에 서동으로서 신라 경주에 들어가 선화공주를 얻으려고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기록이다.

김일손은 후전곡(後殿曲)은 슬프고 촉박하여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여 동네 아이들이나 부녀자라도 모두 노래하였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후전곡이 어떤 사연의 노래인지는 ‘실록’에 설명이 없다.

후전(後殿)의 뜻이 ‘전각(임금이 거처하는 곳)에서 물러나온’이란 의미이듯이, 아마도 왕위를 세조에서 물려주고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 단종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것이 아닌가 싶다.

1455년(세조1) 윤6월11일에 수양대군(세조)이 혜빈 양씨(세종의 후궁)와 금성대군을 제거하자, 겁에 질린 단종은 세조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윤6월20일에 단종은 거처를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1457년 6월22일에 영월로 유배 가서 10월24일에 영월 관풍헌에서 죽었다. 시신은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도 없었다.

따라서 단종애사(端宗哀史)는 조선왕조 초기의 아프고 슬픈 역사이다. 골육상잔 (骨肉相殘)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는 역사이다. 더구나 조선은 충효와 우애를 중시여기는 유교국가 아닌가. 김일손은 이런 아픈 역사를 기억하도록 사초에 후전곡을 적었던 것이다.

그런데 폭군 연산군은 단종의 죽음에 대한 노래, 즉 후전곡에 대하여 친국했다. 증조부 세조가 저지른 치부(恥部)가 드러난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이다.

김일손의 진술은 이어진다.

“신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항상 염려하는 터이온데, 급기야 사가(賜暇)를 받아 독서당(讀書堂)에 있을 적에 성종께서 술과 안주를 내려주셨습니다.

사가독서(賜暇讀書)란 독서당에서 오로지 책과 소일 할 수 있도록 휴가를 주는 것이다. 안식년 제도와 비슷하다. 그런데 자택에서 하는 독서는 내방객들 때문에 공부에 불편한 점이 많고, 절에서 하는 독서는 유교정책의 견지에서 볼 때 불교의 여러 폐습에 오염될 가능성이 허다하므로 별도로 독서당을 두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서거정의 주청이 받아들여서 성종은 1492년(성종 23)에 남호독서당(南湖 讀書堂)을 개설했다. 그 장소는 마포 한강변에 있던 귀후서(歸厚署) 뒤쪽 언덕의 폐사(廢寺) 장의사(藏義寺)였고, 성종은 이 절을 수리하여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된 20칸의 독서당을 만들었다.

김일손은 1493년 7월 예문관응교에 직을 두고 신용개, 강혼등과 함께 독서당에서 공부했다.1)

성종은 김일손을 총애했다. 1490년에 성종은 세조 때 영의정을 한 최항(1409∼1474)이 살던 집인 지금의 이화장을 사들여 요동질정관으로 중국에서 돌아온 김일손에게 하사했다. 김일손이 모친 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모친과 함께 기거토록 한 것이다.

1493년 8월에 성종은 자신이 지은 ‘비해당((匪懈堂) 48영 차운 시’를 홍귀달, 채수, 유호인, 김일손에게 내려주고 이에 대한 답시를 지어 올리도록 했다. 그래서 김일손은 성종의 시 48영에 화답하는 시를 짓고 발문도 지어 올렸다. 2)

김일손은 이렇게 진술을 마무리한다.

신은 그 여물(餘物)을 가지고 배를 띄워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거문고 소리를 듣고 싶기에 무풍정(茂豊正) 총(摠)을 불렀더니, 총(摠)이 거문고를 안고 와서 후전곡(後殿曲)을 연주하므로, 신이 총에게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이 곡을 좋아하느냐?’ 하고, 그 후 사기(史記)를 찬수할 적에 신이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썼습니다. 확실히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김일손은 성종이 내려주신 음식을 가지고 용산에서 배를 띄워 양화나루(楊花渡)에 이르러 무풍정(茂豊正) 이총(?∽1504년)을 불렀다. 이총의 거문고 소리가 듣고 싶어서였다. 이총은 거문고를 안고 와서 후전곡(後殿曲)을 연주했다. 거문고 소리를 들은 김일손은 이총에게 ‘무엇 때문에 이 곡을 좋아하느냐?’고 말하고 나중에 사초에 후전곡을 기록했다.

사진-=겸재 정선의 양화진 그림 (합정동 절두산 성지)

무풍정 이총은 태종의 후궁에게서 태어난 온령군 정의 손자이다. 김종직의 문하생이었고, 남효온의 사위였다. 그는 양화도 별장(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서 시와 거문고를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지낸 거문고의 달인(達人)이었다. 김일손도 독서당에서 특별한 거문고 탁영금(濯纓琴 보물 제957호)을 연주했는데 가끔 이총으로부터 거문고 연주 지도를 받곤 했다.

한편 연산군의 친국이 끝난 후 빈청에서 유자광이 주도한 국문에서 이총은 공초하기를, “김일손이 독서당에서 사람을 시켜 신을 불렀으므로 신이 작은 배를 타고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가서 만났으나, 김일손이 기록한 곡조 및 같이 온 사람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였다.(1498년 7월12일 7번째 기사)

이총은 김일손을 만난 적은 있으나 후전곡을 연주한 것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진술한 것이다.

사진=절두산 순교성지에서 바라본 양화대교

(사진의 동상은 김대건 신부이다.)

1) 「탁영선생연보」에는 ‘1493년 7월 예문관 응교에 직을 두고 사가독서를 하다. 8월 어제 48영에 화답하는 시를 짓고 발문을 지어 올리다.

9월 독서당에서 「추회부(秋懷賦)」를 짓다. 10월 무풍정 이총이 내방하여 거문고 곡을 논하다’라고 적혀 있다.( 『탁영선생문집』 p693 )

2) 원래 ‘비해당 48영시’는 세종대왕의 3남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자신의 별장인 비해당의 풍물 48가지를 읊은 시이다. 1450년 가을에 안평대군은 ‘48영 시회’를 열었는데 이 모임에는 당대 문사인 최항·신숙주·성삼문·이개·김수온·서거정·강희맹 등이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안평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으로 둘째 형 수양대군(맏형은 단종의 부친인 문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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