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8년 7월 12일에 김일손은 “또 이른바, ‘영응대군 부인 송씨(? ~ 1507년)가 군장사(窘長寺)에 올라가 법(法)을 듣다가 시비(侍婢)가 잠이 깊이 들면 승려 학조(學祖)와 사통(私通)을 했다.’는 것은 박경(朴耕)에게 들었다.’고 공초하였다.

박경은 즉시 끌려왔다. 박경은 공초하기를, “신은 정유(丁酉) 연간에 사경(寫經)의 일로 봉선사(奉先寺)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동대문(東大門)에 방(榜)이 붙기를,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을 했다.’ 하였기에, 신은 이것을 김일손에게 이야기해 주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2일 9번째 기사) 1)

박경은 정유년(1477년 :성종 8년) 즈음에 불경을 베끼는 일로 세조의 능이 있는 남양주 광릉의 원찰(願刹)인 봉선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에 붙어 있는 방(榜)을 보았다. 거기에는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로 적혀 있었다. 그래서 이를 김일손에게 알려준 것이다.

사진=세조왕릉 (국립고궁박물관 ‘세조’ 전시회)
사진=봉선사
사진=동대문(흥인지문)

세종의 8남이자 막내아들인 영응대군(1434∼1467)의 부인인 대방부인(帶方夫人) 송씨는 판중추부사 송복원의 딸이며 지돈녕부사 송현수(단종의 장인)의 누이로서 단종 비 정순왕후의 친고모이기도 하다. 단종 비 정순왕후가 간택되었을 때에도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영응대군이 1467년에 죽자 송씨는 불교에 귀의하여 법회(法會)를 열고 승려와 가까이 했는데 그 중 한 명이 학조였고, 학조와 스캔들까지 벌였다. 그녀는 서울 근처의 군장사란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학조와 사통을 했고, 이것이 동대문에 방(榜)이 붙은 것이다.

한편 학조는 여러 사람과 간통하였다. 처음에는 개천(价川)과 사당(社堂)을 간통하고, 드디어 승려가 되어 왕래하면서 간통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후에 남산(南山) 기슭의 작은 암자에 살면서 구인문(具仁文)의 친여동생[嫡妹]이 자색(姿色)이 있음을 보고, 등회(燈會)를 인연으로 개천(价川)의 도움을 받아서 드디어 간통할 수 있었는데, 구씨(具氏)도 꾀임을 당하여 여승[尼]이 되었다. (성종실록 1479년 4월13일 2번 째 기사)

그런데 송씨는 1479년(성종 10) 6월에 연산군의 생모인 중전 윤씨(? ~ 1482)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폐서인(廢庶人) 되자 어린 원자인 연산군(1476∼1506)을 잠시 보살핀 적도 있어 연산군과 각별하였다. 2)

그 사례가 1496년(연산군 2년) 4월23자 연산군일기이다.

사헌부에서 대방부인 송씨가 안신사(安神寺)에서 성안의 사족(士族)집 과부와 승니(僧尼 승려와 비구니)를 많이 모아 크게 법회(法會)를 벌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헌부 관리 5명을 보내어 적발토록 하였는데,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절 문 앞까지 가지도 않고 돌아왔으므로, 사헌부는 이들을 가두고 국문하였다.

그런데 송씨부인은 연산군에게 곧바로 상언(上言)하였고 연산군은 그 내용을 사헌부 지평 이자견에게 내려주면서 그냥 덮으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러자 이자견은 불복하였다. 그는 "신들이 듣자옵건대, 학조(學祖)가 주창하고, 송씨는 시주(施主)가 되어 법회를 크게 베풀고서 뭇사람을 선동하였다 하니, 크게 치화(治化)에 누를 끼쳤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사헌부 관리를 보내어 적발토록 했으나, 관리가 그들의 뇌물을 받고서 정상을 숨기고 불복하니, 국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벼이 버려둘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내가 중을 두둔해서 이런 전교를 내린 것은 아니다. 강제로 없는 사실을 억지로 적발하기 위하여 형장(刑杖)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어찌 정사를 하는 체통이겠는가. 두 번이나 버려두라고 명하였으되 그대들이 들어 주지 않으니, 비록 대간이라 할지라도 어찌 임금의 명령을 어겨서야 되겠는가. 버려두라." 하매, 이자견이 아뢰기를,

"신들이 법을 집행하는 관원으로서 어찌 죄 없는 사람에게 그릇된 죄를 가하려 하겠습니까? 자세히 국문하여 실정을 얻고야 말겠습니다. 풍문에 의하여 탄핵하는 것은 본부(本府)의 직책입니다. 지금 바야흐로 부리(府吏)와 중을 국문하고 일이 송씨에게 미치지 않았는데, 도리어 무릅쓰고 상언(上言)하였으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하였다.

연산군은 다시 전교하기를, "송씨가 비록 실지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죄를 가해서는 불가한데, 하물며 사실이 없음에랴. 내가 두 번이나 버려두라고 명령하였는데도 그대들이 이와 같이 듣지 않으니 임금이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다음날 사헌부 지평 이자견이 연산군에게 또 아뢰기를,

"대방부인(帶方夫人)이 과부와 승니(僧尼)를 많이 모아 놓고 절간에서 유숙하였으니, 이는 풍속에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전일에 월산대군의 부인이 흥복사(興福寺 흥복사는 세조 때 원각사로 개칭됨에서 불사(佛事)를 크게 베풀었는데, 그때에 대간이 미처 검거하지 못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니, 신들이 지금 이 일을 듣고서 어찌 감히 끝까지 국문하지 않으리까. 풍문에 의하면, 중 학조(學祖) 및 선종판사(禪宗判事) 보문(普文)과 원각사 주지 연희(衍熙)가 다 송씨의 불사(佛事)에 참여하였다 하므로, 신들이 연희에게 물으니, 연희의 대답이, ‘나는 가지 않았고, 학조와 보문만이 가서 참여하였다.’하므로, 또 보문에게 물으니, 숨기고 불복합니다. 그 언사가 같지 않으니, 돌아가서 국문해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학조(學祖) 등은 중으로서 불사에 참여하였는데, 무슨 죄가 있겠는가. 송씨의 일에 대하여는 비록 진실로 말한 바와 같다 할지라도, 내가 두 번이나 말했는데, 그대들이 듣지 않으니, 이와 같이 한다면 나라가 나라꼴이 안 될 것이다." 하였다.(연산군일기 1496년 4월24일 1번째 기사)

사진=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제2호) 안내문. 세조는 1465년에 흥복사(興福寺)터에 원각사를 세웠음.
사진=원각사지 10층 석탑

이토록 연산군은 송씨 부인을 감쌌다. 그랬기에 송씨 부인의 일을 기록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 더욱 화가 났으리라.

한편 1503년 2월11일 연산군일기에도 송씨의 음란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중종반정으로 임금이 된 중종이 송씨에게 쌀과 콩을 하사한 기록에도 “송씨는 승려 학조(學祖)를 몹시 믿어 추문이 파다하였으나, 폐주가 사관에게 그 사실을 쓰지 못하게 했었다.”고 실려 있다. (중종실록 1507년 7월 18일) 3)

사진=성종실록 (전주 경기전 실록각)

1) 박경은 1498년 7월28일에 석방되었다.

명하여 박경(朴耕)을 석방하게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박경이 말한 것은 삭제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는 곧 학조(學祖)가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부인 송씨를 몰래 간통했다는 사실이었다. (연산군 일기 1498년 7월 28일 6번째 기사)

2) 폐비윤씨는 1482년 8월 16일 사약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3) 연산군일기 1503년 2월11일

대방부인(帶方夫人) 송씨(宋氏)가 상소하여, 청풍군(淸風君) 이원(李源)의 관직을 회복해 주기를 청하니, 그대로 좇았다. 송씨는 음란하여 일찍이 대군(大君)의 상(喪)을 당하여 재(齋)를 올렸는데, 저승의 화를 벗기려고 혹은 절에 가서 예불(禮佛)하고 혹은 집에서 중을 맞아다가 대접하였다. 그러다가 중 학조와 간통하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추잡하게 여겼다.

중종실록 1507년 7월18일

전교하기를,"영응대군 부인 송씨(宋氏)는 본래 은혜가 있고 또 나이 늙었으니 쌀 30석과 콩 20석을 주라." 하였다. 【송씨는 승려 학조를 몹시 믿어 추문이 파다하였으나, 폐주(연산군)가 사관에게 그 사실을 쓰지 못하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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