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윤필상 · 유자광 등은 빈청에서 김일손에 대한 문초를  계속했다. 김일손은 사초에 기록된 권람 · 남효온 등의 일에 관하여 공초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3일  2번째 기사) 

김일손은 공초하기를, "순(舜)임금의 아비 고수(瞽瞍)와 우(禹)임금의 아비 곤(鯀)이 모두 악덕(惡德)이 있었는데, 우(虞)·하(夏)의 사관(史官)이 책자에 직서(直書)를 하였으며, 또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찬수하시는데 오직 정공(定公)·애공(哀公)에 한하여 미사(微事)가 많았습니다. 세조대왕은 신이 섬기던 임금이 아니시므로 당시의 지나친 처사를 기휘(忌諱)하지 않고 모두 썼습니다.” 

중국 신화시대에 순임금 (BC 2255∼2208 재위)은 요임금으로부터 임금 자리를 물려받은 이다. 순의 아버지 고수(瞽瞍)는 장님이었는데 완고하였다. 그는 순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자 재혼하여 아들 상을 얻었다. 그런데 고수는 후처의 꾐에 빠져 그녀의 말만 믿고 순을 괴롭혔다. 그렇지만 순은 효도와 우애를 다했다. 이 소문이 요임금에게도 들어갔다.

요임금이 임금이 된 지 70년이 되자 그는 후계자를 물색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요임금에게 아뢰었다. 
“장가도 안 든 사람이 민간에 있사온데 우순(虞舜)이란 사람입니다.” 
요임금은 “나도 이야기는 들었소. 어떤 사람이요?”라고 물었다.

“장님의 자식으로 아비는 어리석고, 어미는 간사하며, 아우인 상은 오만합니다. 그러나 효로써 잘 화해시키고 성심껏 다스림으로써 간악함을 크게 감화시켰다 합니다.” 

이에 요임금은 “내 그를 시험하리라. 그에게 딸들을 주고 두 딸을 통하여 그의 행동을 살펴보리라.”하였다.  

사진=우제묘(虞帝廟) (중국 계림 우산(虞山)공원에 있다)
사진=우제묘 안내문

요임금은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 순의 품성을 관찰하게 하였다. 그런데 순의 아버지와 계모 그리고 이복동생의 학대는 더욱 심해져서 마침내 순을 죽이려 하였다.

하루는 순의 아버지가 순에게 창고의 지붕을 고치도록 하였다. 순이 지붕위로 올라가자 아버지와 계모 그리고 이복동생은 합세하여 사다리를 치워버리고는 밑에서 불을 질렀다. 이런 일을 예상한 순은 미리 준비해간 두 개의 삿갓을 어깨에 묶고는 날듯이 내려와 위기를 모면했다.

순을 죽이려는 가족들의 시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순에게 우물을 파게 했다. 위험을 눈치 챈 순은 우물을 파면서 옆으로 빠지는 통로를 미리 파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순이 우물을 파고 있을 때 순의 가족들은 돌로 우물을 메워버렸다.

이윽고 이복동생 상은 ‘두 형수들에게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해야지’라고 생각하며 순의 집에 들어섰다. 그랬더니 순이 태연하게 거문고를 타고 있는 것 아닌가.

 

사진=우제묘에 있는 아황전

 

사진=우제묘에 있는 여영전

두 딸을 통해 순의 행실을 알게 된 요임금은 마침내 순을 요직에 앉혔다. 순의 나이 30세였다. 이후 순은 30년간 요직을 맡았고, 요임금이 돌아가시자 순은 61세에 즉위하여 39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사진=우제묘에 있는 여영전
사진=우임금 영정

 

사진=우제묘 전경
사진=우제묘 입구

이런 일을 우 나라의 사관들은 순임금의 아비 고수에 대하여 미화하지 않고 직서(直書)하였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나온다.  

우임금(BC 2205-2198 재위)은 순임금의 뒤를 이은 하나라(BC 2205-1766)의 태조로 곤의 아들이었다. 곤은 순임금 밑에서  9년 동안 홍수를 다스렸지만 성공하지 못하여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순임금은 곤의 아들 우에게 사공(司空)의 벼슬을 내리고 치수를 명했다. 이 날은 그가 혼인한 지 4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 후 우는 13년간 물길을 다스리는 일을 하면서 세 번이나 집을 거쳐 갔으나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고 오직 물을 다스리는 일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우는 순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았고 이어서 그의 아들 계가 왕위를 물려받아 이때부터 왕위 세습제가 이루어졌다. 1) 

순 · 우 임금은 중국의 성군(聖君)이었다. 그렇지만 사관은 성군의 못된 아비에 대하여 사관은 직서 했다. 그만큼 사관의 평(評)은 냉엄했다.  

이어서 김일손은 “또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찬수하시는데 오직 정공(定公)·애공(哀公)에 한하여 미사(微事)가 많았습니다.”라고 공초하였다.  
 『춘추』는 공자(BC 551~479)가 편찬한 노나라의 역사책이다.  『춘추』에는 노나라 은공 원년(BC 722)에서 애공 16년(BC 477)까지의 246년의 역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런데 정공(BC 509∼495)와 애공(BC 494∼477)의 역사에는 미사(微事)가 많았다. 미사란 미언(微言)으로 쓴 일이다. 공자는 기록 의도가 거의 드러나 있지 않은 것처럼 역사를 썼다. 그러면서 행간에 감추어진 기록의 의도를 나타냈다. 이것이 미언대의(微言大義)이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애공 4년 봄, 주나라 역법으로 2월 경술일 도적이 제나라의 제후 신을 살해했다.” 

이 구절만 읽으면 산적 같은 도적이 제나라 제후를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좌구명이 지은 『춘추좌씨전』을 읽으면 제나라 제후는 친척인 공족에 의해 살해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나라 제후는  무늬만 제후이지 실질적인 제후가 아니었기에 공자는 ‘살해당했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이렇듯  공자는 개개의 사실에 대하여 단호한 평가를 내렸다. 이런 엄정한 필법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한다. 

이어서 김일손은 “세조대왕(1417∼1468 재위 1455∼1468)은 신이 섬기던 임금이 아니시므로 당시의 지나친 처사를 꺼리거나 두려워서 피하지 않고(忌諱) 모두 썼다고 진술했다. 

1) 그런데 우임금의 아비 곤의 악덕 관련 자료는 찾을 길이 없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