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4년 12월29일에 연산군(1476∼1506)이 18세에 조선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1) 이 날 성균관 및 사학(四學)의 유생(儒生)들이 대궐문 밖에서 곡림(哭臨)하였다. 이어서 성균관 유생 조유형 등이 수륙재를 지냄은 효도가 아니니 금지를 청하는 글을 올렸다. 연산군은 "조종조부터 의례(依例) 행해 온 일이다."라고 하면서 좇지 않았다.

창덕궁 인정전

한편 장령 강백진, 정언 이의손이 “수륙재에 대한 대간의 간언을 금지한 데 대해 실망한다.”고 아뢰었다. 이에 연산군은 "이 일은 선왕(先王)을 위한 것이므로 결코 들어줄 수 없는 것인데도 감히 말하므로, 아뢰지 말도록 하였노라."고 하였다.

1495년 1월1일에도 삼사는 수륙재를 지내지 말도록 간언하였다. 심지어 승정원의 승지들도 나서서 재를 지내지 말도록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따르지 않았다(연산군일기 1495년 1월1일 6번째 기사)

“승지들이 아뢰기를, "신들의 마음도 또한 미안합니다. 대간·홍문관뿐 아니라 태학(太學)의 유생까지 대궐 문밖에 모였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선왕을 위하여 재 지내는 것은 지성에서 나왔으나 마땅히 막 즉위하신 이때에 특별히 명령하여 하지 못하게 하시면 중외가 다 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말한 바는 옳다. 그러나 만약 재를 지내지 못하게 한다면 대비의 마음이 어찌 더욱 애통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그만둘 수 없다." 하였다.

한편 1월1일에도 성균관 생원 조유형 등은 수륙재 지내는 것이 선왕의 정치에 누(累)가 된다고 상서(上書)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1월2일에 조유형 등은 좌의정 노사신을 비난했다.

"지금 노사신이 정승의 자리에 있어 선왕의 탁고(托孤)의 명(신임하는 신하에게 어린 임금의 보호를 부탁하는 분부)을 받았으니, 마땅히 임금을 도리에 맞게 인도할 시기인데도, 총애를 굳힐 꾀만 힘써 안으로는 궁중의 뜻을 맞추고 밖으로는 충성스런 간언(諫言)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 노사신은 불경을 해독하여 거의 세조(世祖)를 그르칠 뻔했는데, 지금 또 그 술책으로 전하를 농락하려 합니다. 재(齋)를 베풀라는 명을 거두시고 노사신을 중형에 처하소서.”

1월3일에도 성균관 생원 조유형 등이 불공(佛供)하는 것이 불가함을 논하자, 연산군은 "대간의 말도 윤허(允許)하지 않았는데 너희들의 말을 어찌 들을 수 있으랴. 27일을 지낸 뒤에 물으리라 하였다”(연산군일기 1495년 1월3일 3번째 기사)

1월4일에 윤필상·노사신·신승선등이 대간의 탄핵을 받고 사직을 청했으나 연산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날 성균관 생원 조유형 등이 수륙재를 찬성한 노사신을 탄핵했다 (연산군일기 1495년 1월4일 4번째 기사)

“노사신은 대행 대왕의 죄인입니다. 전하께서 노사신의 말은 공경이라 하여 들으시고 신들의 말은 천한 자라 하여 듣지 않으시니, 이게 옳습니까?”

연산군은 분노하였다. "너희들이 재상을 능욕(凌辱)하는 것은 옳으냐? 들을 만한 일이라면 어찌 일찍이 좇지 않았으랴."

1월7일에 연산군은 제2재(第二齋)를 진관사(津寬寺)에서 1월14일에 제삼재(第三齋)를 봉선사(奉先寺)에서 거행했다. 2)

봉선사 입구

 

 

봉선사


그런데 삼재(三齋)의 소문(疏文) 짓는데 혼란이 있었다. 당초에 내섬시 정(內贍寺正) 이균(李均)으로 하여금 소문을 지어 바치게 했다가 이균이 임박하여 사양하자. 연산군은 승정원에서 지으라고 전교했다. 그러나 승정원이 사양하자 다시 이균에게 명령하여, 결국 이균이 지어 바쳤다.

(연산군일기 1495년 1월12일 4번째 기사)

1월19일에도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이거가 제4재(第四齋) 소문(疏文)을 짓기를 사양했다.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임금의 명령을 모두 다 사피(辭避 사양하여 거절하고 피함)한다면, 임금은 장차 어떻게 하란 말이냐." 하였다.

1월21일에 연산군은 사재(四齋)를 정인사(正因寺)에서 거행하였다. 3)

사재(四齋)를 마친 연산군은 1월22일에 생원 조유형 등 1백57인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수륙재를 지낸지 28일 만이었다.

이러자 대신들과 삼사에서 하옥을 간곡히 만류하였다. 심지어 비판의 당사자인 노사신도 “유생들은 마음에 우러나면 글에 쓰는 것 일 뿐 다른 뜻은 없으니 내버려두자”고 만류했다. 이러하자. 연산군은 유생 157명의 하옥을 취소했다. 그러나 추국은 계속하라고 전교했다. (연산군일기 1495년 1월22일 7번째 기사)

이어서 대간들은 유생들을 추국하지 말라고 간언했지만 연산군은 강경했다. 능상(凌上 : 윗사람을 능멸함)죄를 반드시 묻겠다는 것이었다.

 

1) 연산군 이융은 1476년(성종 7) 11월7일 적장자로 태어나 18년 뒤 부왕 성종이 25년 만에 붕어하자 (1494년 12월24일) 닷새 뒤인 1494년 12월29일에 창덕궁에서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 뒤 그는 12년 동안 조선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다가 1506년에 왕조 최초의 반정으로 폐위되었으며, 그 날로 강화도로 유배되어 두 달 만에 30세에 병사(病死)했다. (김범, 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 항아리, 2010,p 82-83)

2) 진관사(津寬寺)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에 있는 절이다. 고려 현종이 1011년에 진관대사를 위하여 세웠다. 1397년(태조 6)에 태조는 이 절을 여러 번 행차하여 수륙재를 지냈다. 태종도 1413년(태종 13) 이 절에서 성녕대군을 위한 수륙재를 지냈다. 봉선사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인 광릉의 능침사로 남양주시 광릉 근처에 있다.

3) 정인사(正因寺)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에 있는 수국사(守國寺)의 전신이다. 성종의 부친인 덕종(德宗)을 모신 경릉(敬陵)의 능침사로 창건되었다. 한편 추강 남효온이 지은 ‘정인사(正因寺)에 묵으며 설준 화상(雪峻和尙)께 올리다 2수’가 있다. (추강집 제3권/시(詩) 칠언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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