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칼럼니스트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연산군 즉위 초기에 수륙재 문제를 제기한 삼사는 외척 등용과 비리에 대하여도 문제를 제기했다. 1495년 2월11일에 연산군은 이철견을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로, 윤탄을 동지의금부사로 임명했다.(연산군일기 1495년 2월11일 3번째 기사)

다음 날 지평 최부가 다양한 논거를 들면서 즉각 반대했다. 1)

"이철견이 전일에 판의금부사로 있을 적에 정호(鄭灝)의 첩 종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서 갖은 방법으로 위협 공갈하여 곧 빼앗아 간음하였으므로 이 일이 말썽이 되어 파직을 당했고, 윤탄은 충청감사였을 때 무능했고 기생과 간통했으며 환속한 의초라는 승려와 부정한 금전관계를 맺어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습니다.”(연산군일기 1495년 2월12일 1번째 기사)

그러나 연산군은 지난 일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부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정언 이의손과 대사헌 이의 등 다른 대간들도 합세하여 몇 달 간 이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5년 2월13일, 3월1일, 4월28일, 5월1일, 2일, 13일, 5월28일)

연산군이 뜻을 굽히지 않은 데는 이들이 외척이었기 때문이다. 이철견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조카(이철견의 어머니가 정희왕후의 여동생)였고, 윤탄은 성종비 정현왕후의 숙부(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의 동생)였다.

사진 23-1 광릉 종합안내도 (경기도 남양주시)
사진 23-2 세조 비 정희왕후 능

그런데 1495년 5월에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임명이 문제가 되었다. 연산군은 3월에 신수근을 호조참의로 임명했다가 5월11일에 좌부승지로 임명했다. 지평 최부와 정언 이자견 등은 신수근이 공이 없는데도 중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발했다. 5월28일에 승지 신수근이 대간이 탄핵하므로 사직을 청했으나 연산군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연산군일기 1495년 5월28일 3번째 기사)

6월21일에 대간이 이철견·윤탄·신수근 등의 죄를 치죄하기를 합사하여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결국 듣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21일 1번째 기사)

한편 외척의 잘못된 행실을 처벌해야 한다는 삼사의 주청도 잇달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성종 비 정현왕후의 동생 윤탕로이었다. 훈련원 부정(종3품) 윤탕로는 1495년 4월10일 성종의 졸곡을 마치기도 전에 기생집에 출입하여 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삼사의 탄핵을 받았다.

사진 23-3 성종 비 정현왕후 능 (서울 강남구 선릉)

삼사는 석 달 넘게 윤탕로의 국문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윤탕로를 감쌌다. 오히려 윤탕로를 사면한다는 단자(單子)를 네 번이나 내려 보냈는데도 따르지 않은 대간을 의금부에 회부하여 국문하라고 전교했다. 이러자 승정원에서 너그러이 용서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연산군은 "신하로서 명령을 거역하여도 죄가 없단 말이냐?" 하였다. 승정원에서 다시 아뢰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이오니 더욱이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간언(諫言)하는 자로 하여금 그 기운을 꺾이게 해서는 안 될 줄 아오며, 만약 죄를 주시면 언로(言路)에 방해될까 걱정입니다."하였다.

연산군은 "내 뜻은 임금의 명인데 네 번이나 거역하였다는 것이다. 이같이 굳이 거역하는 것이 나를 무시하는 것 밖에 되지 않으니, 신하된 도리가 과연 이런 것이냐. 이래서 국문하려 하는 것이다. 원상(院相) 등에게 유시(諭示)하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이에 영의정 노사신은 "임금님의 하교가 지당합니다."라고 말하고, 윤필상은 "지만(遲晩: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자복自服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신승선은 가부의 말이 없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 29일 1번째 기사)

한편 홍문관 직제학 표연말· 전한 김수동·부응교 홍한·부교리 권오복과 성희안·부수찬 손주와 이과 · 박사 이관 · 저작 송흠 · 정자 권민수와 성중엄 등이 아뢰기를, "대간을 해직시켜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하라는 명령을 듣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간은 만약에 한 번 유지(宥旨 : 용서한다는 명령)을 받게 되면 다시 다툴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유지를 받들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대간의 간언한 일을 가지고 죄를 주신다면, 누가 전하를 위하여 간언하겠습니까. 신들은 결코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옛날 임금은 어질기 때문에 이와 같았지만, 나는 어질지 못하니 당연히 추국해서 죄를 주어야겠다."고 했다.

이렇게 연산군은 억지를 부렸다.

이윽고 표연말 등이 대간을 석방하라고 여러 번 아뢰자, 연산군은 "사헌부에서 유지(宥旨)를 받지 않았으니 당연히 국문해야 하고, 사간원 간원은 석방하라."고 한 발 물러섰다.

표연말 등은 다시 아뢰기를, "청컨대 사헌부도 아울러 석방하시면 성덕(盛德)에 더욱 아름다울 것이니 다시 깊이 생각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 29일 3번째 기사)

다음 날인 6월30일에 표연말 등이 사헌부가 죄 없음을 깊이 살피시어 추국하라는 명령을 거두라고 아뢰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6월 30일 1번째 기사)

이어서 신승선이 대간을 가둔 것은 잘못이라고 아뢰니, 연산군은 듣지 않으매, 신승선은 더 청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제 자리로 갔다. 이어서 대사헌 최응현·대사간 이감 등이 같은 사연으로 아뢰기를,

"대간은 죄가 없으니 국문하지 말아야 하오며, 국상(國喪)의 졸곡(卒哭)을 마치기 전에 기생과 간음하면 죄를 용서할 수 없는데, 하물며 윤탕로는 왕비의 지친으로서 창기에 묵었으니 대간이 탄핵하는 것은 당연합니다."하니, 연산군은 "단자(單子)를 받지 않는 것은 바로 명령을 거역한 것이다."라며 듣지 않았다. 대사헌과 대사간이 다시 아뢰기를, "대간이 윤탕로를 논하는 것은 바로 공론입니다. 청컨대 국문을 마소서." 하니 그때야 연산군은 언관을 석방하라고 전교했다.(연산군일기 1495년 6월30일 2번째 기사)

7월1일에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사하여 윤탕로를 국문하라고 아뢰었지만 연산군은 듣지 않았고, 그를 국문하면 정현왕후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우려도 덧붙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1일 1번째 기사)

그러나 삼사는 연일 윤탕로를 국문하라고 아뢰자, 결국 연산군은 윤탕로를 파직하면서 국문은 들어 주지 않는다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6일)

하지만 삼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국문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연산군은 다시 한 번 타협하여 윤탕로를 외방에 부처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삼사는 직첩을 박탈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청했고, 그런 요구에 밀린 연산군은 윤탕로의 직첩을 거두고 경기도에 부처시켰다(연산군일기 1495년 7월21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윤탕로의 형 윤은로도 삼사의 탄핵에 직면했다.

1495년 5월25일 장령 이유청은 약방제조 윤은로가 별다른 공로도 없고 탐오한데 가정대부(종2품)로 가자된 것은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5개월 뒤

장령 이자건은 문제를 다시 제기했으며(1495년 10월 8일), 연산군은 윤은로를 특진관에서 면직시켰다. (1495년 10월13일) 2)

 

1) 최부(1454∽1504)는 중국 3대 여행기중 하나인 『표해록』을 지은 자로서 강직한 간관이었다. 그는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도당이라는 이유로 함경도 탄천으로 유배가서 1504년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했다.

2) 김범 지음, 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2010, p 97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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