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칼럼니스트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95년 7월19일에도 삼사는 "전하께서 대의로써 결단하시어 노사신을 빨리 귀양 보내소서."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19일 1번째 기사)

이 날 영의정 노사신이 사직을 청했다. 그는 사직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생각하옵건대, 선유(先儒)의 말에 ‘정권은 하루라도 조정에 있지 않아서는 안 된다. 정권이 조정에 있지 아니하면 대간(臺諫)에 있고, 대간에 있지 아니하면 궁위(宮闈)에 있게 된다. 정권이 조정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대간에 있으면 어지러워지고, 궁위에 있으면 망한다. 국가의 치란과 흥망은 모두 여기서 말미암는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선비들의 습속(士習)이 날로 잘못되어 남의 비밀을 들춰내는 것을 곧은 일이라 여기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며, 일의 경중과 대소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말만을 성현의 경전으로 여겨 애써 이기는 데만 힘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임금과 몇 달 동안 맞서 분쟁이 그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죄를 탄핵하는 계청(啓請)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반드시 옛적의 아주 작은 허물까지 샅샅이 더듬어 애써 흠을 들춰내어 죄에 빠뜨리고야 맙니다.

그러면서 대간의 체통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스스로 말하니, 대간의 이름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높아지지만, 위태로운 습속만 점점 늘어가고, 충직하고 중후한 풍기는 날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대간이 말하면 홍문관이 뒤를 잇고, 홍문관이 말하면 태학생(太學生)이 잇달아서, 서로 화답하는 것이 전례가 되었습니다.

흠 없는 데서 흠을 찾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말을 만들어, 남이 혹시 자기와 다른 의견을 내면 그때마다 논박하여 갖은 수단으로 비판하니, 공경(公卿) 대부가 그 입이 두려워서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융성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며 조정의 체통이라 하겠습니까.

이런 습속은 옛날에도 없었고, 우리 조정에서도 역시 없었습니다. 만약 이런 버릇이 그치지 않아 권력이 대각(臺閣)으로 돌아가고, 대신이 입을 다물게 된다면 조정의 일이 어찌 한심스럽지 아니하오리까. 노신(老臣)은 항상 시사(時事)가 이 지경에 이를까 근심스러워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폐단은 신하로서는 갑자기 고칠 수가 없고, 반드시 밝으신 임금께서 뜻을 두어야만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사신은 당당했다. 그는 삼사의 과도한 언론활동을 우려하면서 임금이 강력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연산군은 이러한 노사신을 신임했다. 당연히 노사신의 사직은 반려되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19일 2번째 기사)

한편 삼사는 노사신의 사직소에 매우 분노했다. 삼사는 노사신을 중국의 간신인 조고 · 이임보 · 안녹산 등에 견주면서 나라를 망칠 간웅이라고 탄핵했다. 이런 상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어졌고, 노사신이 물러날 때 까지 계속되었다. 1)

7월20일에 홍문관 직제학 표연말 등이 아뢰었다.

"노사신의 간사한 꼴은 대간·시종으로부터 승지·원상(院相)·사관(史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잘못을 배척하옵는데, 전하의 말씀은 ‘나는 그 잘못을 알지 못하겠다.’ 하시니, 신 등은 실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지금 노사신의 상소를 보면 스스로 옳다 여기며 간사한 말이 더욱 거셉니다. (중략) 청컨대 노사신과 신 등이 아뢴 말을 가지고 공경(公卿) 및 모든 벼슬아치를 다 모아서 의논을 결정케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표연말의 소는 공론(公論)에 부치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 20일 1번째 기사)

사진 1 자계서원 (김일손을 모신 서원이다. 경북 청도군 이서면 소재)
사진 2 자계서원 정문
사진 3 자계서원 전경

이어서 대간이 "노사신은 전하에게 간관(諫官)을 없애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대간을 위력으로 제압하여 할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중략) 신 등은 원통하고 분함이 극에 달하여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루빨리 노사신을 처단하여 조정에 용납하지 못하게 하여야 국가가 편안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역시 듣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20일 2번째 기사)

7월21일에도 대간은 노사신의 소를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널리 백료(百僚 모든 벼슬아치)들을 불러서 만약 한 사람이라도 노사신의 소를 옳게 보는 자가 있다면, 신 등이 면전에서 임금을 속인 죄를 받겠다고 하였다. 이러자 연산군은 ‘경들이 실언한 것’이라고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 21일 1번째 기사)

홍문관도 노사신의 죄를 상소하였다.

"무릇 대간이란 임금의 이목(耳目)이 되어 규찰하고 탄핵하는 것으로 자기 임무로 삼으므로, 임금이 지나친 행동이 있으면 규찰할 수 있고, 나라에 큰 좀 벌레가 있으면 제거할 수 있으며, 대신의 간영(奸佞 간사함과 아첨)이나 백료(百僚)의 직무 태만이나, 또는 법을 무너뜨리고 기강을 어지럽게 하여 윗사람을 속이고 사욕을 부리는 자에 있어서는 주저하지 않고 탄핵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악한 자는 대간을 미워하지 않는 자가 없어, 반드시 그 입을 막고 그 죄를 꾸며서 감히 가부를 논하지 못하게 하고, 그 간사한 수단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입니다.

지금 노사신의 나라 망칠 말은 이미 공론에 용납되지 못하니 모두 멀리 내쫓고야 말려 하는데, 노사신은 조금도 반성하는 바 없고 마침내 그 말을 펴서 백 가지로 교묘히 꾸며 도리어 공론을 그르다 하고 스스로 간사한 술책을 옳게 여기니, 임금을 우롱하고 조정을 경멸하는 것이 심하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고 역시 노사신의 말을 옳게 여기시니, 이것이 바로 신(臣) 등이 통곡하는 바입니다. (중략)

대저 사람의 과실과 악(惡)을 규탄하는 것이 대간의 직책이온데, 노사신은 드러나지 않는 사생활을 고발한다 하고, 대신을 논핵하는 것이 대간의 임무인데 노사신은 윗사람을 능욕한다 이르고, 면전에서 부러뜨리고 뜰아래에서 논쟁하여 임금의 위엄을 거슬리고 기휘를 저촉하며, 임금과 더불어 시비를 다투는 것은 대간의 직무인데, 노사신은 자기들이 이기려고만 힘쓴다 하고, 임금과 더불어 맞선다 하니, 아마 전하를 격노하시게 하여 대간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말일 것입니다. (중략)

노사신은 대간의 논쟁을 시속의 폐단으로 삼으며, 대간을 가두고 국문하는 것을 습속을 전환시키는 계기로 삼아서, 정(正)을 변경시켜 사(邪)를 만들어 오늘의 다스림을 전환시켜 후일의 어지러움으로 터 잡고자 하니, 그 화를 끼칠 마음을 내포한 것이 또한 참혹하지 않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는 결단으로 사(邪)를 제거하시어 노사신을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소서."

그러나 연산군은 윤허하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21일 2번째 기사)

한편 7월21일에 노사신은 다시 사직 소를 올렸다.

"신은 어제 사람들의 말썽이 시끄럽게 일어나매 사직하는 소장을 올리었는데, 전하께서 비답(批答)을 내리시어 윤허하지 않으시니, 성은이 황공하고 송구합니다. 그러나 신이 외람되이 재상 자리에 있은 뒤로 비방하는 논의가 이와 같은데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직에 나아간다면, 신의 죄가 더욱 중하게 될 뿐 아니라, 신 때문에 구설이 흉흉하여 조정이 편안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빨리 신을 파직시키고, 어질고 덕 있는 자를 구하시어 조정을 편안하게 하신다면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서 대간은 노사신의 소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노사신을 탄핵하였다. 연산군은 역시 윤허하지 않았다.

이윽고 대간이 아뢰기를, "윤탕로에 대하여는 전하께서 외방에 부처(付處)하라는 명령은 내리셨으나, 직첩(職牒)을 환수하라는 전교는 듣지 못했으니, 전하의 전교를 들려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직첩을 환수하고 경기에 부처하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7월 21일 3번째 기사)

외척 윤탕로는 직첩이 회수되고 유배를 갔다. 그러나 노사신은 여전히 연산군의 신임을 받았다. 대간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자못 궁금하다.

사진 4 자계서원 강당 (보인당)
사진 5 자계서원 사당 (존덕사)

 

1) 김범 지음, 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2010,

p 123-132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