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따라 산 타기 시작해 65세에 은퇴

“사람들의 남획 보다 숲 울창해져
햇빛 들어오지 않아 약초가 사라져…
1.8L 짜리 패트병만한 크기 더덕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약초“

12살부터 53년간 지리산약초꾼으로 산 김종선 선생 <1>

김종선 선생은 지리산서 약초와 관련된 사람들 중 최고의 약초꾼 꼽힌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12살에 산을 타기 시작해 은퇴할 때인 65세까지 53년을 지리산 약초꾼으로 살았다.

[한국농어촌방송/경남=황인태 대기자]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에 살고 있는 김종선 선생은 지리산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약초꾼이다. 약초꾼이던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2살에 산을 타기 시작해 은퇴할 때인 65세까지 53년을 지리산에서 약초꾼으로 살았다. 김 선생은 6년 전부터는 더 이상 약초꾼을 하기가 싫어 소일거리 외에는 약초를 캐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리산에서 약초와 관련된 사람들은 김종선 선생이 최고의 약초꾼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김종선 선생은 육식을 전혀 하지 못한다. 원래 제대로 된 약초꾼이라면 육식을 하기가 어렵다는 게 약초꾼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약초꾼들은 된장 하나면 반찬이 충분하다. 된장을 싸가지고 가서 산에 있는 약초를 캐 반찬을 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채식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약초꾼들의 생태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약초꾼들은 대부분 채식주의자가 많다고 한다. 김 선생은 원래부터 육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15년 전부터는 아예 고기 근처에도 가지를 못한다고 한다. 어쩌다가 고기를 먹기라도 하면 배탈이 나서 고생을 엄청 한다고 한다. 김 선생은 그냥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선, 심지어 멸치와 젓갈류도 먹지를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김 선생은 외식을 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식당에 가자고 해도 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식당엘 갈 수 없다. 그래서 김 선생은 언제나 집에서 자신이 심은 채소류와 밥으로만 식사를 한다. 김치도 소금에 절인 정도밖에 만들 수 없다. 먹을 수 없어서 그렇다.

이렇게 채식만 하고 살지만 건강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다. 집안의 유전으로 혈압이 높기는 하지만 그것만 빼면 지금도 잔병은 앓지 않고 지낸다. 보통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만 하면 힘이 없고 피부가 빨리 노화된다는 말이 있는데 김 선생의 경우를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완전한 채식주의자로 15년 이상을 살았는데도 김 선생은 힘은 팔팔하고 나이에 비해 그리 늙어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어려서부터 좋은 약초를 많이 캐 먹은 약초꾼과 일반인을 바로 비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하겠지만 육식을 하지 않는다고 건강을 잃을 것이라는 점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12살 때 약초 캐기 시작해 65세에 은퇴

김 선생은 약초꾼은 되지 말라고 한다. “요즈음이야 약초꾼이 되려는 사람도 없겠지만 약초꾼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미치게 돼 있어서 가정도 팽개치게 됩니다. 약초에 미치는 것이 도박에 빠지는 것보다 더 지독해요. 약초에 빠져 지내다가 약초를 어느 정도 알겠다 싶으면 이미 나이가 다 들어버려요. 인생이 다 지나가야 약초에 대해 조금 알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되도록 후배들에게 약초꾼은 되지 말라고 합니다. 별로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김 선생 자신도 평생 혼자 살았다고 한다. 가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혼자 사는 습관이 되다보니 지금도 혼자 사는 게 편하다고 한다. 김종선 선생은 그러나 효심이 지극해서 몇 년 전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를 평생 모시고 살았다. 이런 이유로 김혁규 전 경남지사에게서 효행상을 받기도 했다.

김 선생이 처음 약초꾼으로 산에 다닐 때는 정말 약초가 무궁무진했다고 한다. 지금은 산림이 울창해져서 약초가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조식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덕산 덕천서원 근처에 감태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당시 감태봉에는 시호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시호는 해열제로 주로 사용되는 데 당시에는 약이 많이 없던 시절이라 시호에 대한 수요가 많았습니다. 약방에서 시호를 캐달라는 주문이 많았어요. 그러면 산에 가기만 하면 한 짐씩 해가지고 내려올 정도로 시호가 지천이었어요.” 김 선생은 자신이 처음 약초꾼으로 활동하던 때를 회상하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초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 많던 시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감태봉에 가도 시호를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요즈음 약초가 사라진 것은 사람들의 남획 보다는 숲 때문이라는 게 김 선생의 진단이다. “약초가 아무리 음지식물이라 해도 일정량의 햇빛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숲이 울창해지면 햇빛이 들어오지 못해 약초가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약초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산불이 나거나 벌목 등으로 나무가 없어지면 어디서 왔는지 약초가 자라기 시작한다는 게 김 선생의 증언이다. 김 선생은 약초는 오랫동안 발아를 하지 않다가 발아할 여건이 되면 싹이 트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다고 한다.

지치에서 나오는 자초롱 어린아이에게는 최고의 영약

김 선생은 요즈음 볼 수 없는 약초 가운데 귀한 것으로 지치(자초)를 들었다. “당시에는 야생 지치를 쉽게 찾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야생 지치(자초)는 거의 찾기가 어렵게 됐어요. 이것도 숲이 울창해져서 그렇습니다. 지치는 보약인데 야생 지치를 하나 먹으면 평생 추위를 타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약효가 좋아서 약초꾼 사이에는 산삼과도 바꾸지 않는 게 지치입니다. 그런데 지치에는 재미있는 것이 있어요. 지치를 캐다가 보면 뿌리 근처에 쌀눈처럼 생긴 혹이 있어요. 뿌리와 줄기가 갈라지는 곳에 하얗게 붙어있습니다. 이것을 자초롱이라고 합니다. 이 자초롱은 흙에 떨어지면 녹아버려요. 그래서 자초롱을 캘 때는 종이를 깔고 틀면 종이에 떨어집니다. 이를 모아서 한지에 싸서 보관하는데 이 자초롱을 젖먹이 어린아이에게 먹이면 열 살까지는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 영약입니다. 그런데 이 자초롱은 재배하는 지치에게서는 볼 수가 없어요. 야생 지치에만 생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약초입니다.”

김 선생의 동네에서도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지치를 캐 먹고 잠드는 바람에 동네사람들이 횃불 들고 찾아 나선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동네에서 지치를 캐 먹은 사람은 평생 병치레를 하지 않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고 한다. 그만큼 지치는 몸에 좋은 영약이다. 김 선생은 요즈음은 야생 지치를 찾을 수 없어서 안타깝다고 한다. 요즈음은 재배 지치가 시중에 많이 나오는 데 재배 지치는 약효가 없다는 게 김 선생의 주장이다.

1.8L 패트병만한 더덕 캐 먹고 12년간 점심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아

김 선생이 약초를 캐면서 먹은 약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더덕이라고 한다. 32살 때인가 왕산 근처에서 1.8L 짜리 패트병만한 더덕을 캤다. 그런데 한 입 먹으니 너무 매워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싸가지고 집에 가지고 왔는데 아버지가 더덕을 보시고는 좋은 약이니까 먹으라고 해서 억지로 한입씩 베어 먹었다.

“억지로 먹고서 이불에 기대어 누웠는데 잠이 들었어요. 아버지가 일어나라고 고함을 쳐서 일어났는데 벌써 해가 졌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는 저를 보더니 너 얼굴이 왜 그렇느냐고 하는 거예요. 더덕을 먹고 얼굴이 빨개져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더덕을 먹고 저는 그 이후 12년간 약초 캐러 산에 갈 때 점심을 안 싸가지고 다녀도 배가 고프지 않았어요. 정말 그 더덕은 신기할 정도로 효과가 좋았습니다.” 김 선생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더덕이 약효에 대해 신기할 따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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