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창덕궁 인정전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77년 8월15일에 성종은 임사홍을 좌승지로, 한한을 우승지로, 손순효를 좌부승지로 임명했다. 좌승지 이극기는 강원도 관찰사로 발령 냈다.

그런데 임사홍은 우승지에서 좌승지로 영전되어 도승지 현석규와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잘 된 인사가 아니었다.

8월17일에 성종은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사간 박효원과 장령 경준이 현석규와 임사홍의 죄를 논하고 국문하기를 청했다.

성종은 짜증냈다.

"두 승지가 스스로 죄가 없다고 밝혔는데 어떻게 죄를 주겠는가?"

영사(領事) 한명회가 아뢰었다.

"죄가 국가에 관계되지 않으니, 고신을 거두고 심문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성종은 "그렇다면, 정승과 대간이 모두 모여서 심문하라."고 전교했다.

(성종실록 1477년 8월 17일 1번 째 기사)

8월17일에 성종의 어명에 따라 상당부원군 한명회와 무송부원군 윤자운이 대간(臺諫)과 함께 현석규 등을 심문하였다.

현석규가 말하였다.

"신이 의금부에서 승정원으로 돌아오니, 좌승지 이극기 등이 ‘조식 등을 형문(刑問)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일을 논계하려고 하기에, 신은, ‘명(命)이 벌써 내려서 계달(啓達)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고 생각하였는데, 홍귀달이 독자적으로 계달하였습니다.

신이 곧 이르기를, ‘내가 도승지이고, 또 형방(刑房)인데, 어째서 나에게 고하지 아니하고 들어가서 임금에게 계달하였는가? 만약 신숙주가 동부승지이고, 강맹경이 도승지가 되었어도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는데, 대간들은 ‘내가 이름을 들먹이며 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비록 용렬하지만, ‘너’라고 어찌 욕을 했겠습니까?

그 뒤에 임사홍이 승전색(承傳色 어명을 전달하는 일을 맡은 환관)에게 나에 대해 말하기를, ‘성상께서도 승지를 대하실 때에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는데, 공(公)이 ‘귀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영공(令公)은 어째서 오늘 아침에 아뢰지 않은 말을 아뢰었소?’ 하니, 그때 마침 이극기가 밖에서 들어와 위로하여 풀어주어서 그친 것이지, 내가 억지로 참은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임사홍이 말했다.

"도승지가 ‘내가 뜻이 있어서 노공필에게 말하였다.’고 하였기에, 내가 승전색(承傳色)에게 그렇지 않은 것을 밝히고 ‘성상께서 승지를 대하실 때에도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예방(禮房)」·「형방(刑房)」이라고 일컬으시는데, 공이 「귀달」이라고 부른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노공필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우연히 말한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이윽고 한명회 등이 아뢰었다.

"이제 보건대, 승지들이 분(忿)을 품고 다툰 것은 아닐지라도 서로 불평의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손비장과 이경동 등은 아뢰기를,

"신 등이 듣건대, 임사홍이 말하기를, ‘영공(令公 현석규를 만함)은 실지로 귀달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니, 사간원의 차자(箚子)가 잘못되었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서로 힐책한 것이니, 청컨대 사헌부에서 논한 바와 같이 하소서."

사진=창덕궁 인정전

성종은 정창손과 김국광을 불러 전교했다.

"승지들이 화합하지 못하니, 임사홍과 한한·손순효를 다른 직책으로 바꾸어서, 함께 있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정창손 등은 이것은 작은 잘못에 불과한 데, 갑자기 세 사람을 체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대답했다.

(성종실록 1477년 8월17일 4번 째 기사)

하지만 대간이 다투기를 그치지 아니하므로, 성종은 임사홍을 대사간으로, 한한을 병조참의로, 손순효를 형조참의로 전보 조치했다. (성종실록 1477년 8월17일 5번 째 기사)

이 날 도승지 현석규가 소장을 올려 사직하고자 했으니 성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성종실록 1477년 8월17일 6번 째 기사)

8월18일에 성종은 경연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사헌부 집의 이경동이 아뢰었다.

"임사홍과 현석규가 다툰 것이 명백한데, 지금 임사홍을 언관의 장(長)으로 삼고, 현석규는 임사홍과 같은 죄인데 홀로 승정원에 머물러 있으니, 신은 옳지 못하게 여깁니다."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었다. 그러자 영사(領事) 정창손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말의 작은 실수이므로 대체로 관계없습니다. 지금 모두 좌천시켰으니, 이것으로도 족합니다."

이어서 성종이 전교했다.

"세 사람이 이미 체임되었으니, 현석규는 체임할 수 없다.“

(성종실록 1477년 8월18일 1번 째 기사)

이윽고 대사간 임사홍이 임금에게 와서 말했다.

"신은 이미 간원의 논박을 받은 사람인데, 언관(言官)을 제수하시니 어찌 언사(言事)를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대사간 직을 면직해 주소서."

하지만 성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성종실록 1477년 8월18일 3번째 기사)

사진=창덕궁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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