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엄마 양파아빠 김유선 정태상

딸기 하우스 10동, 양파 5천 평 가공해 직거래
연매출 4억 원, 규모 더 이상 늘리고 싶지 않아
9살 나이차이, 불편한 몸에도 아내가 결혼 졸라
결혼 후 귀농해 아이 네 명 낳고 행복하게 살아

딸기 엄마 양파아빠 정태상·김유선 부부는 귀농 10년차에 매출 4억 원으로 더 이상 매출을 늘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딸기 엄마 양파아빠 정태상·김유선 부부는 귀농 10년차에 매출 4억 원으로 더 이상 매출을 늘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국농어촌방송/경남=황인태 대기자] 함양에서 딸기엄마 양파아빠로 유명한 김유선, 정태상 부부는 스토리가 많은 사람들이다. 결혼에서 귀농까지 이들 부부가 살아온 삶은 얘깃거리가 많다.

남편인 정태상 대표는 오른손이 없다. 어릴 때 소 사료 만드는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가는 사고로 오른 손을 잃었다. 이런 장애를 극복하고 9살이나 적은 김유선 대표를 만나서 결혼에 성공했다. 자연 도둑님이란 소리를 들을 수밖에.

딸기 엄마인 김유선 대표는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나는 순간 남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했다. 친구들과 함께 있어도 남편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첫눈에 반해 결혼을 조른 것도 아내인 김유선 씨. 많은 나이와 장애 때문에 망설이는 남편에게 오른손이 돼 주겠다며 결혼을 졸랐다.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한 부부는 2년 후 남편 정태상 대표의 고향인 함양으로 귀농을 하게 된다.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잘 나가던 정 대표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도시 생활에 점차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내인 김유선에게 조심스럽게 고향으로 갈 뜻을 내비쳤다. ‘남편 바라기’이던 김유선 씨는 망설이지 않고 동의했다. 그래서 이들의 함양 살이가 시작됐다.

고향에는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계셨다. 정태상 대표는 부모님을 돕는 일에서부터 농촌생활을 시작했다. 아내는 처음에는 농사일을 하지 않았다. 함양의 조그만 회사에 다녔다. 김유선 씨는 아이를 키우고 회사 일을 하는 것으로 함양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을 뒤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2014년 양파파동이 생긴 것이다. 당시 양파 풍년으로 양파값이 폭락해 20kg들이 양파 한 망에 5000원도 받지 못했다. 팔리지 못한 양파들이 길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것을 보다 못한 김유선 씨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트럭에다가 양파를 싣고 창원, 의령, 함안 등지를 다니며 팔았다. 모두 6차를 팔았는데 240만원을 벌었다. 기름값을 빼고 부모님께 양파값 주고 나니 손에 남는 게 없었다. 우리 농촌의 현실을 체감하는 사건이었다.

이 일 이후 김유선 씨가 본격적으로 농사일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평생 도시에서 산 김 대표가 농사일을 직접 할 수는 없었다. 김 대표는 농사일 대신 부모님과 남편이 생산한 농산물로 직거래를 열었다. 딸기엄마 양파아빠라는 브랜드로 인터넷을 통해 농산물과 가공품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대박이 났다. 여기저기서 주문이 쏟아졌다. 자신들이 농사지은 농산물로 직접 제품을 만들어서 파는 것이 고객들의 신뢰를 얻으면서 판매량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태상, 김유선 부부는 매년 4억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앞으로 규모를 키울 것이냐는 질문에 정태상, 김유선 부부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 더 이상 늘리지 않을 것이다. 딱 지금 이대로 100세까지 살고 싶다.”고 말했다. 늘 성장하는 것이 좋은 일이란 고정관념 속에 살아온 우리들의 머리를 치는 말이었다.

다음은 정태상, 김유선 부부와의 인터뷰이다.

▲함양에는 언제 왔나.

-2009년 창원에서 고향인 함양으로 귀농했다.

▲귀농하기 전에는 무엇을 했나.

-29살인 2004년도에 직장을 찾아 창원으로 가서 자동차 대리점에서 자동차 세일즈를 했다.

▲자동차 세일즈가 힘들었나.

-아니다. 기아자동차 마산합포 대리점에서 일했다. 그런데 2006년도에 신인 판매왕을 할 정도로 성과가 좋았다. 신인왕이 되려면 매월 10대 이상씩 6개월을 지속해야 한다.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자동차 세일즈에는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정도면 좋은 직장에 성과도 좋은 편 아닌가.

-그렇다. 그런데 도시에서의 직장생활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이다. 가족들도 등한시하게 되고 점차 지쳐갔다. 제가 장남이라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아내와 상의했다. 그런데 아내가 흔쾌히 승낙해줘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아내와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 어떻게 결혼했나.

-9살 차이이다. 2006년도에 기아자동차 신인왕이 된 해에 만났다. 그해가 저한테 운이 좋은 해였던 것 같다. 당시 아내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시기였다. 그리고는 1년 사귀다가 2007년도에 결혼했다.

▲집안에서 반대하지 않았나.

-제가 몸도 성하지 않고 나이 차이도 많으니 당연히 처가댁에서 반대했다. 제가 그 입장이라도 반대할 거다. 그런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딸의 생각이 워낙 확고하니 허락해 주셨다. 지금도 도둑님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나이 차이도 많고 몸도 불편한데 무엇이 그리 좋았나.

-<김유선> 처음 만나서 반했다. 처음 만났는데 얼굴에서 빛이 났다. 남편 친구들하고 함께 있으면 남편만 보였다. 제가 나이가 어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인연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남편이 너무 좋았다. 제가 결혼하자고 더 졸랐다. 제가 오른손이 돼 주겠다고 했다.

▲몸은 어디가 불편한가.

-오른손이 없다.

▲왜 그리 됐나.

-초등학교 3학년 시절에 소 사료 만드는 절단기에 손이 빨려 들어가 그리됐다.

▲그런 어려움을 겪었는데 얼굴이 밝다.

-사실 저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부모님도 제 기죽지 말라고 강하게 키우셨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제 몸 불편한 것에 대해 위축되거나 부끄럽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데 불편하지 않나.

-저는 익숙해서 그런지 못하는 게 하나도 없다. 저는 늘 오른손이 없어서 못한 건 군대 못간 것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건 무슨 말인가.

-부모님이 저를 장애등급 신청을 하지 않았다. 저를 장애인으로 생각하지 않으신 거다. 그래서 신체검사 영장이 나왔다. 그래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 그랬더니 신검하는 사람들이 기가 차는지 왜 왔냐고 물을 정도였다. 당연히 군에 가지 못했다. 사실 저는 가고 싶었다. 그 정도로 저는 제 몸이 불편한 것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귀농해서 어떻게 시작했나.

-부모님이 원래 농사를 짓고 계셨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는 부모님을 돕는 일부터 시작했다. 아내는 농사를 하기 보다는 회사를 다녔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부부가 본격적으로 농사에 뛰어들게 된 것인가.

-2014년도에 양파파동이 있었다. 저희는 그 당시도 양파를 5000평 정도 지었다. 그런데 양파 20kg들이 한 망이 5000원도 하지 않았다. 농협에서도 양파를 수매해 가지 않았다. 남는 양파가 길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양파를 트럭에 싣고 창원, 함안, 의령 등지에 팔러 나갔다. 트럭 한 대에 120망이 들어간다. 그것을 6대를 팔았다. 그래서 번 돈이 240만원이었다. 기름값 빼고 부모님에게 얼마 드리고 나니 남는 것이 없었다. 그때 우리 농촌의 현실을 처음 체험했다. 그래서 이렇게 있어서 안 되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농사에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무슨 일을 했나.

-남편은 농사를 짓고 저는 가공을 해서 직거래를 시작했다. 딸기엄마 양파아빠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잘 됐다. 지금은 남편도 직거래 일을 많이 도와주고 있다.

▲직거래는 주로 어떤 것들을 하나.

-딸기는 잼과 즙을 만들고 양파도 즙과 잼을 만든다.

▲판매는 주로 어떻게 하나.

-함양군내에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로컬푸드 직매장이 있다. 함양군청에서 운영하는 거다. 거기에 납품을 해서 판매하고 있다. 또 인터넷으로도 판매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얼마 정도 팔리나.

-직거래에서 얼마 파는 지는 정확하게 계산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저희들의 전체 농사에서 연간 4억 원 정도의 매출이 생긴다. 부모님과 동생까지 합쳐서 그렇다.

▲동생도 귀농을 했나.

-도시에서 사는 것 보다 농사짓는 게 낫다며 제가 불러 내렸다.

▲농사는 어떤 것을 짓나.

-양파를 연간 5000평, 딸기 하우스가 10동, 벼가 2만평, 한우 25마리, 그 외 밭 조금 등이다.

▲이 정도면 대농 아닌가.

-적은 농사는 아니다. 그래도 저희 부모님과 저희 내외, 동생이 다 짓는다. 물론 바쁠 때는 인부도 쓴다.

▲그럼 이 농사의 총매출이 4억 정도면 순수익은 어느 정도인가.

-그것도 엄격하게 계산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50% 정도는 순수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매출규모가 더 증가시킬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정도가 딱 좋다. 더 많은 양을 하게 되면 고객관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농사도 더 많이 짓지 않을 것이며 직거래 양도 더 늘리지 않을 것이다. 딱! 지금 이대로 100세까지 살고 싶다.

▲그럼 가격을 올릴 생각은 없나.

-그것도 생각이 없다. 지금도 사실 대기업이 만드는 것에 비해 가격이 높다.

▲그건 왜 그런가.

-대기업이 공장에서 만드는 것과 저희들이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사용하는 재료나 들어가는 재료의 양 등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딸기 잼의 경우 저희들 제품이 대기업 제품에 비해 디자인이나 포장 등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허접하다. 그래도 고객들이 저희 제품을 사는 이유가 제품의 질이다. 저희들은 제품을 사용해 본 사람들이 다시 구매하는 그런 고객들이다. 모양을 보고 사는 고객들이 아니다.

▲제품 자랑을 좀 해 달라. 양파 잼은 처음 듣는다.

-그렇다. 양파 잼은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상품이다. 저희들도 만들어 놓고 보니 의외로 반응이 좋다. 그래서 특허출원을 검토하고 있다.

▲양파 잼은 어떻게 만드나.

-양파 잼은 자주색 양파로 만들고 있다. 함양은 양파가 주산지일 정도로 양파의 질이 좋다. 또 잼을 만들 때 설탕 대신 프락토올리고당을 사용한다. 그래서 당뇨가 있는 사람들도 괜찮다. 좋은 재료를 듬뿍 넣어서 잼을 만들기 때문에 양파를 생으로 먹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양파의 좋은 성분을 섭취하는 데 유용하다. 특히 블루베리를 넣어서 만들기 때문에 먹을 때 씹는 맛도 느낄 수 있다.

▲가격은 얼마인가.

-300g 1통에 1만원을 받고 있다.

▲생산량이 얼마나 되나.

-연간 1000여개 생산하고 있다.

▲인기가 좋으면 더 만들 것인가.

-그럴 생각이 없다. 더 만들려면 설비를 증설해야 하고 직원도 고용해야 한다. 지금 규모가 딱 적당하다.

▲자녀들은 몇 명인가.

-딸 셋에 막내가 아들로 4명이다.

▲귀농하고 어느 정도 되니 자리가 잡히던가.

-저희들의 경우는 2년 지나니 자리가 잡혔다. 그런데 저희들의 경우는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계셨고 그것을 저희들이 가공하는 등 조금 발전시킨 것이다. 아무런 기반이 없는 경우는 좀 더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활동은 하나.

-조금 자리가 잡히자 활동을 시작해 아내가 4H연합회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경남 부회장을 맡고 있다. 저희들의 귀농노하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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