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78년 5월7일에 성종은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듣건대, 정숙공주가 일찍이 예종을 여의고 임사홍에게 의지하여 아버지로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임사홍이 엄형에 처해지니 슬퍼하고 있다고 들었다. 형장(刑杖)을 속(贖 형장 대신 돈을 바침)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였다.

홍응이 아뢰었다.

"공주께서 슬퍼함은 진실로 가엾고 민망스러우나, 사형을 감한 것도 성상의 은혜가 지나치게 중한데, 형장을 가볍게 속(贖)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성종이 말하였다.

"경등이 법을 고집함은 진실로 아는 바이나, 공주가 본래 병이 있어서 이로 인하여 더해질까 두렵고, 또 공주의 일로 인해 삼전(三殿 세조 비 정희왕후, 덕종 비 소혜 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를 말함)께서도 애처로워하시니, 나 또한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

다시 홍응이 아뢰었다.

"일시의 은정(恩情)은 이와 같을지라도, 인정으로 인해 법을 굽힐 수는 없습니다.“

이어서 도승지 손순효가 아뢰었다.

"신이 임사홍과 더불어 일찍이 동료가 되었으나, 간사함이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임사홍은 바로 죄의 괴수입니다. 김맹성 등과 같은 두세 사람은 임사홍의 간사함을 알면서도 즉시 아뢰지 아니하였으니 진실로 죄가 있으나, 임사홍에 비하면 경중(輕重)이 있습니다."

이러자 성종이 물었다.

"누가 가볍고 누가 무겁다고 이르는가?"

손순효가 아뢰었다.

"김맹성 등은 처음에는 박효원에게 속은 바가 되었다가 나중에 박효원의 간사한 꾀를 깨닫고 의논하여 반격하려고 하였으나 한때의 동료이기 때문에 마침내 중지하고 실행하지 못하였으니, 그 본래의 뜻은 임사홍과 같지 아니합니다."

성종이 말하였다.

"그렇다. 과연 그런 것이 있었다."

이러자 홍응이 아뢰었다.

"김맹성 등은 간관으로서 이미 간관의 도리를 잃었고, 또 성상 앞에서 바로 계달하지 않았으니, 죄 또한 작지 않습니다."

성종이 대꾸하였다.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시 홍응이 아뢰었다.

"이창신과 채수의 일은 증거가 없어서 실정을 알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성종이 말하였다.

"이창신이 임사홍의 직려(直廬 승정원의 숙직하는 방)에 가서 어찌 말한 바가 없었겠는가? 전일에 대질하여 물을 때에 이 두 사람이 가장 말을 많이 하였으니, 혹시 이런 배척할 마음이 있어서 임사홍에게 말하고, 그 뜻을 엿보았을 것이다. 이것도 또한 간사한 것이다."

(성종실록 1478년 5월7일 2번째 기사)

선릉 (성종 임금의 능, 서울시 강남구 소재)
선릉 (성종 임금의 능, 서울시 강남구 소재)

조금 있다가 대간이 합사(合司)하여 와서 아뢰기를, 임사홍의 죄를 감하여 준 것에 대해 부당성을 지적했다.

"임사홍 등의 죄를 특별히 명하여 사형을 감하셨는데, 신 등이 되풀이하여 생각건대, 임사홍은 대간에게 은밀히 사주(使嗾)하여 조정의 정사를 문란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하를 속였으니 법대로 처단해도 오히려 남는 죄가 있습니다."

성종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내가 가볍게 논죄(論罪)했다고 하는가? 만약 내가 가볍게 논죄했다면, 내가 애초에 반드시 적발해 국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자광은 선왕조(先王朝) 때의 원훈(元勳)이므로, 결장(決杖)하는 것은 내가 또한 어려우며, 임사홍은 비록 공신은 아니지만, 그 아비 임원준이 또한 좌리 공신에 참여 하였다. 만약에 법대로 처단한다면, 전일에 삽혈동맹하기를, ‘영구히 죄를 용서한다.’고 한 뜻에 어긋남이 있다."

대사헌 유지 등이 다시 아뢰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호랑이를 기르면 스스로 근심을 남긴다.’고 하였으니, 임사홍 등을 비록 먼 지방에 귀양 보낸다 하더라도 다른 날에 다시 서용(敍用)할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청컨대 법대로 죄를 주소서."

성종은 "대간의 말을 다 믿을 수 있는가?"라고 전교하였다.

이러자 유지 등이 연거푸 아뢰었다.

"지금 임사홍의 일은 개국이래로 없었던 것이니, 비록 다 베지는 못할지라도 청컨대 죄의 괴수를 베어서 그 나머지를 경계하면 뒤에 대간이 된 자가 자연히 경계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성종실록 1478년 5월 7일 3번째 기사)

성종이 대간의 말을 들었다면 임사홍 유자광은 조선의 간신으로 역사에 안 남았을 것인데 정말 아쉽다.

이 날 정숙공주가 상언(上言)하여 그 시아버지인 임사홍의 형장(刑杖)을 속(贖)해 주기를 청하였다.

성종은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이 상언을 보건대 말이 매우 박절하니, 내가 임사홍의 결장(決杖)을 속(贖)하려고 한다."

이러자 어제 모여서 의논한 재상 한명회 등이 와서 아뢰었다.

"사형을 감한 것도 족한데, 형장을 속(贖)할 수 없습니다.“

유지 등도 아뢰었다.

"임사홍의 죄는 결코 가볍게 논할 수 없습니다."

이러자 성종이 전교하였다.

"대신과 대간의 말이 진실로 옳으나, 다만 오늘 낮에 삼전(三殿)에 문안을 하였더니, 정숙 공주가 병든 몸으로 와서 통곡하고 삼전께서도 슬프게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법을 굽혀 은혜에 따르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다. 또 유자광은 선왕조(先王朝) 때의 구신(舊臣)으로 일찍이 함께 삽혈 동맹하였는데, 종사(宗社)에 관계되지도 않는 일로써 하루아침에 형장(刑杖)을 가하는 것은 또한 의리에 옳지 못한 것이다.”

이러자 한명회가 아뢰었다.

"청컨대 훈적(勳籍)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소서. 예로부터 훈적에 있으면서 귀양 간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성종은 전교하였다.

"김맹성과 김괴 등은 임사홍이 박효원에게 은밀히 사주한 것을 알고 서로 면책(面責)하였으며, 또 공박하여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마침내 그렇게 못한 것은 반드시 그 술책에 빠진 것이다. 형장을 속(贖)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한명회 등이 아뢰었다.

"지금 임사홍 등은 사형을 감한 것도 족한데 또 형장을 속하면 너무 가볍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가산을 몰수하고, 훈적을 삭제하여 먼 지방에 귀양 보내소서. 또 죄의 괴수에게 형장을 속하면, 김맹성과 김괴도 마땅히 속해야 할 것입니다."

지평 강거효는 아뢰었다.

"전하께서 공주의 일로 인해 특별히 임사홍의 형장을 속(贖)하시는 것은 그 허물을 아시면서 고의로 하시는 것입니다. 임사홍은 그만두고라도 그 나머지 유자광과 김언신·박효원은 법대로 처단하소서."

이러자 성종이 전교했다.

"그들은 먼 지방에 귀양 보내고, 김맹성과 김괴는 형장을 속(贖)하라."

다시 한명회가 아뢰었다.

"오늘 삭적하였다가 내일 다시 주는 것은 오직 성상의 재결에 달려 있습니다."

이어서 유지가 아뢰었다.

"율문(律文)에, ‘공신을 삭적하고 가산을 적몰(籍沒)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사형을 감하시고, 또 형장을 속(贖)하시고, 또 처자를 종으로 삼는 것을 면제하셨으니, 그 나머지 조문(條文)은 율(律)대로 하소서."

이에 성종이 말하였다.

"이는 반역이 아닌데, 어찌 가산을 적몰하는 데 이르겠는가? 또 율문(律文)에,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든다.’는 문구도 없다. 그런데 정승들이 어찌 감히 옳지 못한 일로써 아뢰는가? 유자광을 공신적(功臣籍)에서 삭제하라.” (성종실록 1478년 5월7일 4번째 기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