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5년 3월에 김일손은 사직하고 경상도 청도로 귀향하면서 ‘한강을 건너며’ 시를 지었다.

말 한 마리 느릿느릿 한강을 건너니

낙화가 물에 떠내려가니 버드나무가 비웃음을 머금은 듯

미천한 신하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겠는가.

그래도 고개 돌려 남산 바라보니 이미 봄은 저물었더라.

 

渡漢江 도한강

一馬遲遲渡漢津 일마지지도한진

落花隨水柳含嚬 낙화수수류한빈

微臣此去歸何日 미신차거귀하일

回首終南己暮春 회수종남기모춘

자계서원 안내판 (경북 청도군 이서면 소재)
자계서원 안내판 (경북 청도군 이서면 소재)

사직을 하고 서울을 떠나는 김일손은 낙화와 같은 신세이다. 이제 가면 다시 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고개를 돌려 남산을 바라보는 것은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김일손은 경상도 청도로 낙향하면서 충청도 제천에 들렀다. 거기에는 김종직의 제자인 권경유(權景裕 ?∽1498)가 제천현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권경유는 자는 자범(子汎), 호는 치헌(痴軒)으로 1483년(성종 14)에 진사가 되고, 148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김일손이 1486년에 문과급제 하였으니 과거급제는 김일손보다 1년 빠르다.

권경유는 예문관검열에 등용된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1490년에는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홍문관 교리, 검토관, 이조좌랑(1491년)에 이르렀다.

김일손을 만난 권경유는 너무 좋았다. 그는 김일손에게 자기의 서재를 보여주면서 서재의 기문(記文)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김일손의 문장은 조정에 널리 알려졌다. 김일손 사후인 1507년 10월에 중종 임금은 그의 유문(遺文)을 구하기 위해 “내가 듣기로는 중국 사람들이 김일손의 문장은 당나라 문장가 한유(769∽824)에 비한다는 데, 나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 그의 문장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전지를 내리고, 곧 교서관에게 명하여 청도 본가에 가서 유고를 구해오라고 할 정도였다(박주, 김일손,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 1, 돌배개, 2003, p 455, ).

김일손은 서재의 이름을 치헌(癡軒)이라 짓고 기문을 지었다.

그러면 ‘치헌기(癡軒記)’를 읽어보자.

자계서원 사당인 존덕사
자계서원 사당인 존덕사

“나의 벗 권자범(권경유의 자)이 이 고을의 원님이 된지 3년 만에 그 객관의 서쪽에다 집을 새로 짓고 헌함(軒檻 누각 또는 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놓은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나 방)을 만든 다음에 나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자범에게 말하기를 “이름부터 먼저 짓고 기문을 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치헌(癡軒)이란 이름이 어떠한가?” 하였더니, 자범이 치(癡)자의 뜻을 물어왔다. 내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자, 자범은 끝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감히 말하기를 “왕숙과 왕연의 어리석음은 덕을 감추는 어리석음이요, 간교한 어리석음과 질투하는 어리석음은 교활한 자의 어리석음이요, 문예를 하면서도 서치(書癡)가 되고, 무예를 하면서도 호치(虎癡)가 된 것은 재주가 뛰어난 어리석음이다.

여기에서 왕숙은 중국 진나라(280-?) 사람으로 처음에는 그의 숨은 덕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다고 했는데, 그의 조카 왕제(王濟)가 우연히 이야기 하다가 탄식하기를 “집에 명사(名士)가 있는데 30년 동안 알지 못하였구나.”하였다.

글은 이어진다.

술을 끊은 자도 어리석다 하고, 벼슬자리를 그만두는 것도 어리석다하여, 옛날에 이 치(癡)로써 이름을 삼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듯이 그대의 어리석음 역시 하나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대의 어리석음은, 첫째 세상 사람들은 말을 영리하게 하는 데, 그대는 홀로 어리석어서 말만 하면 남의 시기를 사게 되고, 세상 사람들은 아첨을 잘하는 데, 그대는 홀로 행동이 어리석어서 남에게 밉살스럽게 보이고

둘째 세상 사람들은 진취에 교묘하여 벼슬을 얻어서는 잃을 까 봐 두려워하는데 그대는 교리와 같은 청반(淸班)으로서 스스로 낮추어 후미진 고을의 현감이 되었으니 이는 벼슬살이의 어리석음이요.

셋째 세상 사람들은 정무(政務)를 처리하는 데 재빨라서 백성에게 임하면 이름을 앞세우고, 윗사람을 받들 때면 명예를 앞세우는데 그대는 홀로 느긋이 제작에 앉아 읊조리며, 토호(土豪)와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물리치고 홀아비와 과부는 보살펴 주는 데에 마음을 두고, 세금을 독촉하는 데는 소극적이었으니 이는 정사(政事)에 어리석은 것이다.

넷째 세상에 관리 노릇하는 자로서 용렬한 자는 백성의 노고를 빙자해서 객관의 짐이 피폐한 것을 보고도 허물어진 채로 방치해 두고는 일을 간략하게 처리한다고 스스로 말을 지어내며, 일을 잘 한다는 자는 집을 높이 세우고 담장을 쌓는 등 못 하는 일이 없는데, 토목이 원성(怨聲)의 요괴임을 알지 못하고 부지런하고 재간이 있다는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제천에 와서 퇴락한 집을 수리하여, 기왕의 졸렬한 자의 노릇도 하지 않거니와 또 일을 잘 하는 자의 노릇도 못하고, 노는 일손을 부려 백성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도리어 그대의 마음만 수고롭게 하였으니, 이는 일을 함에 있어서의 어리석음이다. 이제 그대의 어리석음을 통틀어서 이 헌(軒)의 편액으로 매다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김일손 지음, 김학곤 · 조동영 옮김, 탁영선생 문집, 탁영선생 숭모사업회, 2012, p 189-194).

이렇게 김일손은 권경유의 바보스런 모습을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서재의 이름을 치헌(癡軒)으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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