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근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 / 전 imbc 사장
하동근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 / 전 imbc 사장

[한국농어촌방송/경남=하동근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 / 전 imbc 사장] 화쟁(和諍)이란 불교사상이 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주창한 화쟁(和諍)은 서로 대립하는 다양한 학설과 이론의 화해와 화합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마음의 근원이라는 뜻의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이 함께 하면 대립하는 다양한 이론들도 결국은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지혜로 귀결된다고 했다. 한국 불교의 중심사상이다. 화리(和理)는 장자의 중심사상이다. 최근 장자의 방대한 저술을 완역한 성균관대 김정탁 교수는 화리는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의 유지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화리의 대척점이 합리라고 했다. 현재 우리 사회는 ‘화리’보다 ‘합리’에 더 치중하고 있는데 합리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속성이 있어 결국은 편을 나누게 된다고 했다. 율곡 이이는 동인과 서인이 벌이는 당쟁을 완화해 보려는 취지에서 양비론이 아닌 양시론을 주장한 적이 있다.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또한 화합과 조화를 염두에 둔 정치 철학이었다. 화쟁과 화리, 화합을 관통하는 글자는 화(和)다. 상대성을 논리전개의 기반으로 하고 있다.

과거나 현재나 정치의 목적은 권력 쟁취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정권을 얻기 위해서 당파를 형성해 정쟁을 벌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오히려 정쟁이 없는 정치는 독재정치나 전제정치에 해당된다. 민주정치는 다당제를 중심으로 여러 정당들이 자신들의 정책과 정견, 철학 내세워 선거를 통해 국민의 선택을 받게 되면, 정해진 기간 정치행위를 하게 되고 다음 선거를 통해 국민의 평가를 받는 것이 통상 절차이다. 그 과정에서 정당은 정책의 옳고 그름을 놓고 서로 따지는 정쟁을 벌이게 된다. 이 시시비비의 기본은 합리에서 출발한다. 간혹 그 대립이 도를 넘어서 격화되는 경우도 있지만, 지나친 것이 문제이지 정쟁 그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다. 다당제 정치제도에서 정쟁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정쟁은 합리를 바탕으로 한 절대성에 논리전개의 기반을 두고 있다.

문제는 정치가 상대적이지 절대적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정치의 또 다른 덕목은 ‘통합’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 백퍼센트 절대선과 백퍼센트 절대악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정치는 서로 다른 의견을 상대적으로 수용해 전체적인 통합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합리를 통해 시시비비를 완전히 가리는 것은 오히려 분열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화(和)에 근거한 통합을 통해 합리에 근거한 분열을 막자는 것이 진정한 정치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화리는 큰 지혜이고 합리는 작은 지혜다. 그런데 이 상대성을 무시하거나 도외시하게 되면 즉 절대적 정치만을 주장하게 되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극복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절대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내부비판이 실종된다. 내부비판이 실종되면 자기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 자기 발전이 없으면 정체된다. 정체되면 경쟁력과 자정력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정치세력은 내부든 외부든 누구에게든지 극복 당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 되고, 또 극복 당한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화(和)가 필요하고 상대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화(和)는 통합을 이루어내는 추동력이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는 대체로 법가들이 통치했던 국가나 정권에서 통합보다는 분열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법률가가 정치를 하다보면 피아를 나누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에 이은 문재인 정권도 법가들이 통치하는 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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