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무오사화) - 59회 김일손, 제천현감 권경유를 위해 치헌기를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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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무오사화) - 59회 김일손, 제천현감 권경유를 위해 치헌기를 짓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9.2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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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이 제천현의 객관 서쪽 집의 서재를 치헌(癡軒)이라고 이름한 네 가지 이유를 대자 권경유가 말했다.

 

어리석음을 가지고 나를 조롱하는 것은 좋지만, 나의 어리석음으로써 이 공관(公館)을 욕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네.”

 

그러자 김일손이 답했다.

 

아 천지 사이의 만물은 모두 조물주가 주관하는 것인데, 이를 크게 보면 어느 물건이 공물 (公物)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물건에 의탁한다면 사사롭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굳이 사사롭게 여긴다면 한 고을의 물건이 6년 임기 내에 모두 사물(私物)에 불과할 것이요, 이를 공물로 여긴다면 이 한 몸, 한 가정도 역시 백년의 공물일 뿐이다.

유종원(柳宗元)도 오히려 유주(柳州)의 시내 이름을 우()라 하였거늘, 지금 어찌 제천의 헌을 치()라 이르지 못하겠는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773~819)798년에 급제하여 집현전 정자로 있다가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한유(768824), 유우석 등과도 친교를 맺었는데, 805년에 헌종(憲宗 778-820, 재위 805-820)이 즉위하자 정치 개혁의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그는 왕숙문과 가까이 지냈는데, 왕숙문이 정권을 잡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발탁되었다.

왕숙문 등은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는 조치인 영정(永貞, 헌종의 연호)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반발이 격렬하여 개혁은 실패했다.

806년에 유종원은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영주는 지금의 후난성 링링시이다. 이후 그는 다시 중앙에 돌아오지 못하고, 815년에는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옮겼고 819년에 47세로 유주에서 죽었다.

유종원은 강설(江雪) 한시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千山鳥飛絶 천산조비절

萬徑人踪滅 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 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 독조한강설

 

온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모든 길엔 사람 자취가 끊어졌네.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눈보라 치는 추운 강에서 홀로 낚시하네.

 

눈 내리는 추운 강에서 홀로 고기 잡는 늙은이.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시이다. 시중유화(詩中有畵). 이 시는 유종원이 영주사마로 좌천된 시절에 쓴 시인데, 정치적 실의와 고독감을 극복하려는 유종원의 강한 정신력을 느끼게 한다.

한편 김일손은 치헌기에서 유종원도 오히려 유주(柳州)의 시내 이름을 우()라 하였거늘, 지금 어찌 제천의 헌을 치()라 이르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자료를 검색하여 보니 우계(愚溪)는 유주(柳州)가 아니라 영주(永州)의 시내이름이다.

유종원은 좌천되어 영주로 내려 온지 5년이 되는 810년에 임시 기거하던 용흥사(龍興寺)의 곁방에서 염계(冉溪) 동남쪽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염계(冉溪) 개울가를 우계(愚溪)로 이름 짓고 8개의 경관을 만들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위안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팔우시(八愚詩)이다. 아쉽게도 팔우시는 원본이 사라졌고, 그 서문만 남아 있다.

바로 우계시서(愚溪詩序)이다. 이를 읽어보자. 1)

관수(灌水) 북쪽에 시냇가가 있는데, 동쪽으로 흘러 소수(瀟水)로 들어간다. "일찍이 염씨(冉氏)가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이 시냇가를 염계(冉溪)라고 불렀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이 물로 염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효능으로 이름을 지어 염계(染溪)라고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바보() 같이 죄를 짓고 소수로 귀양 왔는데 이 시냇가를 좋아하여 2, 3리 들어가 보니 더욱 아름다운 곳이 나타남에 여기에 집을 지었다. 옛날에 우공곡(愚公谷)이 있었지만, 나는 이 시냇가에 집을 짓고도 아직 이름을 정하지 못했는데 사람들 사이에 여러 가지 말이 많아 바보 시냇가 즉 우계(愚溪)로 이름 지었다.

우계에 있는 작은 언덕을 사서 바보 언덕(愚丘)라 하고, 우구(愚丘)로부터 동북쪽으로 60보를 가면 샘이 나오는데, 그것을 또 우천(愚泉)이라 불렀다. 우천은 구멍이 모두 6개로, 산 아래 평지로 흘러가는데 아마도 물이 위로 솟아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물이 합류하여 구불구불 남쪽으로 내려가 우구(愚溝)가 되었고, 흙과 돌을 쌓아 좁은 곳을 막으니 바보 연못(愚池)이 되었다. 바보 연못의 동쪽은 우당(愚堂)이다. 그 남쪽은 우정(愚亭)이고, 연못 가운데는 우도(愚島)이다. 잘 생긴 나무와 기이한 돌이 섞여 있어 모두 기이한 산수인데, 나 때문에 모두 어리석다는 욕을 먹고 있는 것이다.

물은 지혜로운 사람이 즐기는 것인데, 지금 이 시냇물만 유독 어리석다는 이름으로 욕을 보고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아마 물 흐름이 아주 낮아 관개를 할 수 없고, 또 물살이 급하고 큰 돌들이 많아 큰 배가 들어갈 수 없으며, 그윽하고 깊으면서도 얕고 좁아 용들도 좋아하지 않으며 비구름을 일으키지 못하니, 세상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꼭 나를 닮았다. 그러니 비록 어리석다는 욕을 먹어도 괜찮을 것이다.

옛날에 영무자(寧武子)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어리석었다.”하였으니, 이는 지혜롭지만 어리석은 체 했던 것이요, 안자(顔子)하루 종일 어리석은 것처럼 거역하지 않았다.”는데, 이는 총명하면서도 어리석은 척 했던 것이다. 이는 진짜 어리석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 나는 도()가 있는 세상을 만났지만, 이치에 어긋나고 사리에 거슬리니, 나처럼 어리석은 이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 이 시냇물을 차지하려고 다툴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내가 마음대로 이름을 우계라 붙인 것이다.

시냇물이 비록 세상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지만, 만물을 잘 비춰 주고, 물이 맑아 훤히 들여다보며, 금속을 곱게 울려 어리석은 자로 하여금 기뻐 좋아하여 떠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비록 세속에 영합하지 못했지만, 여기서 글 쓰는 일로 스스로 위로하고, 만물을 씻어내기도 하며, 갖가지 자태를 갖추어 피하는 일이 없으니, 이 어리석은 표현으로 우계(愚溪)를 노래하면, 멍청하면서도 도리를 어기는 일이 없고, 잘 모르면서도 만물과 함께 돌아가서, 자연의 기운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들과 엇섞여 적막과 고요함 속에 나 자신마저 잊겠노라. 이에 팔우시(八愚詩)를 짓고 우계(愚溪)의 돌 위에 새기는 바이다.

1) 네이버에서 우계시서를 검색하여 여러 자료를 종합 정리하였다.

 

김일손 묘소 (경상북도 청도군)
김일손 묘소 (경상북도 청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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