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에 실패한 유종원(773~819)은 33세인 806년에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어 815년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이때 쓴 시가 유명한 강설(江雪)이다. 강설은 《당시선(唐詩選)》에 실려 있다.

유종원은  어옹(漁翁) 시도 지었다. 어옹은 고기 잡는 늙은이이다.
시를 읽어보자.  

漁翁夜傍西巖宿    어옹야방서암숙
曉汲淸湘然楚竹    효급청상연초죽 
煙銷日出不見人    연소일출불견인
欸乃一聲山水綠    애내일성산수록
廻看天際下中流    회간천제하중류 
巖上無心雲相逐    암상무심운상축
 
고기 잡는 늙은이, 밤에는 서쪽 바위 가까이 배를 대어놓고 잠자고,
새벽에는 맑은 상수(湘水) 물 길러 대나무로 불 지펴 밥을 짓네.
연기 사라지고 해 떠오르면 그 어옹 보이지 않고, 
뱃노래 한 가락에 산과 물만 푸르구나.
하늘 저쪽 바라보며 강 아래로 내려가 버리니,
바위 위엔 무심한 구름만 오락가락하누나.

아무 욕심 없는 소박한 어부. 유종원은 이 시를 통해 숨어사는 선비의  삶을 그렸다. 


815년에 유종원은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옮겼다. 그리고 4년 후인  819년에 47세의 나이로 유주에서 죽었다.

유종원이 죽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 한유(768~824)가 유종원의 묘비명을 지었다. 한유는 유종원과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했는데, 이는  유학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문장은 수단일 뿐 목적은 도(道)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유는 유종원의 묘비명에서 유종원과  유우석의 우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사람이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참된 절개와 의리가 드러난다. 평소에는 서로 그리워하고 같이 술을 마시며 놀고 즐겁게 웃는 것이 ‘마치 간과 쓸개를 내보일 것처럼 (간담상조 肝膽相照)’하면서 죽는 한이 있어도 우정만은 변치 말자고 맹세한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있으면 언제 봤냐는 듯 외면한다. 말은 제법 그럴듯하지만 일단 털끝만큼이라도 이해관계가 생기는 날에는 눈을 부릅뜨고 언제 봤냐는 듯 안면을 바꾼다. 더욱이 함정에 빠져도 손을 뻗쳐 구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빠뜨리고 위에서 돌까지 던지는 인간이 이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유종원과 유우석의 우정을 알아보자. 유우석(劉禹錫 772~842)은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중앙의 감찰어사로서 왕숙문 ·유종원 등과 함께 정치 개혁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805년에 낭주사마로 좌천되었다. 

10년의 세월이 흐르자 일부 대신들이 유우석을 변경에 놔두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헌종에게 주청했다. 그리하여 유우석은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장안은 크게 변해 있었고, 조정도 달라져 있었다. 때마침 따뜻한 봄날에 유우석은 친구들과 함께 도교사원  현도관으로 복사꽃 구경을 갔다. 유우석은 복사꽃들을 보고 즉흥적으로 시 한 수를 읊었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날리는 꽃잎
꽃구경하고 돌아오며 웃는 얼굴들
현도관에 자라난 천 그루 복사나무
그 모두 유랑(劉郞)이 간 후 심은 것이 아닌가.

이 시는 신속히 퍼져 나갔다. 그런데 일부 대신들은 이 시의 숨은 의미를 캐었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복사꽃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권세가들을 풍자한 것이었다. 

시는 큰 논란을 일으켰다. 화난 헌종은 유우석을 파주자사로 좌천시켰다. 파주는 궁핍하고 산수 험한 오랑캐 땅이었다. 그런데 유우석에게는 여든이 넘은 노모가 있었다. 어떻게 연로한 노인을 모시고 파주로 간단 말인가? 험지에서 노인이 견딜 수 있을까? 유우석은 난감했다. 

이 때 영주사마에서 유주자사로 자리를 옮기게 된 유종원이 절친한 친구 유우석이 파주자사로 가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파주는 아주 외진 변방인데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갈 수도 없을 것이고, 이 사실을 어머님께 알릴 수도 없을 것이니 유우석 대신 내가 파주로 가겠다.”고 소를 올렸다. 

유종원의 진심 어린 우정에 많은 사람들은 감동했다. 그래서 유우석의 딱한 사정을 헌종에게 말했다. 이에 헌종은 유우석을 연주(連州) 자사로 발령냈다. 

한유는 유종원의 묘비명에서 유종원과 유우석의 의리와 우정을 강조하면서 비정한 세태를 신랄하게 꼬집은 것이다.


이후 후세 사람들은  유종원과 유우석 같은 변치 않는 우정을 간담상조 (肝膽相照)라 했다.  ‘마치 간과 쓸개를 내보일 것처럼’하는 우정 말이다. 

여기에서 자문자답해본다. 김일손과 권경유의 우정은 간담상조(肝膽相照)일까? 답은 ‘그렇다’이다. 두 사람은 사관으로서 사초에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적었고, 이로 인해 무오사화로 능지처사 당했으니까.

성종임금이 김일손에게 하사한 ‘탁영 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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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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