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자랑 독립운동 33인이신 박준승 선생님이 가까이 계셨네

박준승 선생님 동상
독립운동가 자암 박준승 선생 옥중 시비 동상 (사진=박태일 기자)

[한국농어촌방송/전북=박태일 기자] 임실이 낳은 위대한 선각자로 구국 항일 독립 운동의 횃불을 높이든 박준승 선생은 1866년 고종3년 아버지 박호진 선생과 어머니 복씨 사이에서 셋째로 임실군 청웅면 아랫배치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성태이며 천도교 도호는 자암이다그의 어린 시절은 국내외 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안으로는 양반 지배층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민중에 대한 수탈이 강화 되고 있었으며 밖으로는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후 일본과 청나라 등 주변국들의 침략이 노골화 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반봉건, 반침략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선생은 15세가 되던 1880년에 원암 김영원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2년간 수학하였는데 당시에 후일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분이신 자강 양한묵 선생과도 동문수학 하였다.

1890년 동학에 입도식을 올리고 동학 도인이 되었으며,1892년 삼례에서 있었던 교조신원운동집회와 이듬해 원평에서 열린 척외양창의 운동을 위한 대집회에도 참여하였다.

1894년 고부에서 반봉건, 반침략을 기치로 내세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선생도 운암면 지천리에서 최승우김영원 선생 등 임실의 동학도들과 함께 기포 하였다.

독립운동가 박준승 선생 추모비 (사진=박태일 기자)
독립운동가 자암 박준승 선생 추모비 (사진=박태일 기자)

 

1896년부터는 동학의 포교에 전념하여 주가 되었으며이듬해  32세에 수접주가 되었다.

1904년에 접어들어 동학교가 진보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개화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동학지도자인 박 선생도 청웅면 남산리 홈다리에서 최승우,김영원,이기동,조석걸,허선 등 수백 명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단발을 하고 폐정개혁을 위한 진보회를 개최하였다.

이 일로 48일간의 옥살이를 하였으며, 이 때 손병희 선생이 여러 차례 면회를 다녀가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청웅면 향교리 성밭에 설치된 임실군 천도교 제2교구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교령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도훈이 되었다.

1915년 김승화씨를 부인으로 맞으면서, 업무 수행을 위해 임실을 떠나 정읍시 산외면 평리로 이사 하였다.1916년 에는 전라도 도사로 임명되어 전라도 최고 책임자가 되었으며 1918년에는 천도교 원로기구인 경도사에 추대되었다. 1919224일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하여 다음날 천도교 중앙총에서 권동진 선생으로부터 3.1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나는 본래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인 만큼 찬성한다라고 말하면서 3.1독립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가 이처럼 결연한 의지를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학농민 운동을 하면서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 잡은 반외세. 반침략. 자주독립 의지가 표출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천도교 대표의 한사람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에 들어가게 되었다31일 거사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으면서도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결연한 독립 의지를 보여 주었다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옥한 후 1926년 천도교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에 추대 되었다.

이듬해인 1927323일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안계마을 자택에서 62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정읍시 북면 마장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196231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196566일 정읍시 민관합동 사회장으로 정읍시 구미동 성황산에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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