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객원교수(전 학부장)
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객원교수(전 학부장)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객원교수(전 학부장)] 서울에서 10일간 체류한 후 다시 시골로 돌아왔다. 이번 서울 체류기간 동안 제법 한 일이 많았다. 고등학교 동창 친구 자녀 결혼식에도 참석하고 지인들을 만나 식사하고 차를 마시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정 중의 하나는 우리 대학에서 마지막 고별강의를 녹화한 것이었다. 며칠간 연이어 하루 2주차 분량의 강의를 녹화했다. 이로써 나의 인생 여정에 커다란 한 획이 그어진 셈이다. 근 20년간 우리 대학에서 강의를 해왔는데 이번 강의녹화가 마지막이 되기 때문이다. 강의 녹화 일정이 빡빡해서 고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쉬움과 회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 가을이 아프기 좋은 계절이라서 그랬을까. 강의를 마치고 나서 며칠 앓아 누었다. 몸살이 난 것이다.

이번과 같은 빡빡한 일정이 아니더라도 약간 무리가 되었다 싶으면 병이 나기는 한다. 오랜 지병 탓에 면역력이 많이 저하되어 있기에 툭 하면 고장이 나는 것이다. 서울로 올라갈 때는 정해진 일정만 마치면 하루빨리 이곳 시골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건강상태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느라 며칠을 더 머무르게 되었다. 이렇게 병이 나면 무엇이든 내 뜻대로 할 수 없으니 일상적인 삶의 질서가 흐트러진다. 그렇기는 하지만 또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병이 날 때마다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건강할 때는 그저 그렇게 지내는 것이 당연한 듯 받아들이다가 병이 났을 때 비로소 우리네 삶의 여정에서 잠깐 멈추어 서서 내가 가야 할 길에서 얼마나 빗나가 있는지 살펴보고 원래 목적지로 방향을 다시 다잡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런 뜻에서 병도 가끔은 내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보왕삼매론’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기 쉽나니.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몸 상태가 완전 정상에 이르지 못했으니 몸이 낫거든 고향으로 가라고 아내는 이야기했지만 나는 굳이 고집스럽게 다시 이곳 고향으로 돌아왔다. 죽을 만큼 심하게 아프지는 않으니 차를 타고 고향으로 오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이곳에 와서 며칠간을 몸조리하면서 보냈다. 집 안 청소만 간단히 하고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낙엽 쓸어내기 등 정원(마당) 작업도 하지 않고 글쓰기도 하지 않았다. 독서는 간간이 하긴 했으나 그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 읽었을 뿐이다. 그것도 무료함을 떨쳐내기 위한 한 방편이니 읽고 싶으면 읽고 싫으면 다시 접어두고…. 그럼에도 무료함이 계속 느껴질 때면 정원을 거닐었다. 입동이 지난 후라 바람이 조금 세게 불 때는 약간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렇게나마 걸을 수 있는 정원이 있다는 것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정원이 없는 집에서 사는 것은 영혼 없이 사는 것과 같다’라는 영국 속담이 제대로 가슴에 와 닿았다. 정원을 거닐면서 곳곳에 심어져 있는 이 나무 저 나무를 관찰하고 만져보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정원을 거닐면서 주변도 돌아본다. 집 앞 산등성이 중간쯤 위치한 대나무밭에서는 대나무들이 늦가을 바람에 흐느끼듯 춤을 춘다. 대나무밭보다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솔밭, 그 솔밭을 지나온 바람도 제법 냉기가 느껴진다. 정원 주변 나뭇가지 위에는 내가 그 이름을 잘 알지 못하는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면서 놀고 있다. 대나무, 소나무, 마당 주변에 심어져 있는 각종 정원수들, 바람소리, 새소리, 맑고 푸른 하늘…. 나는 아직 자연의 그 무엇이 구체적인 치유작용을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고 긴장이 풀어짐을 느낀다. 자연의 치유력이 생각보다 빠르고 강한 것만은 틀림없다.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려왔지만 자연과 함께라면 앞으로 살아갈 나날에 대한 희망이 생긴다.

이렇게 자연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된다. 오래전 병이 나서 살길 찾아 들어왔던 고향 산천, 다시 병들어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위로해 주고 토닥여 주고 자꾸 가슴 어디쯤에 무얼 넣어주는 고향 산천…. 나에게 너무 따뜻하게 다가와 여기에 기대고 몸담는 것만으로 병이 그냥 나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니 그 혜택을 단단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자연으로부터 떨어지기 위해 지독하게 애를 쓴 우리 인간이 이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지 며칠 만에 다시 정상이다. 정상은 편안함이고 그래서 다시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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