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대군의 문란한 여성관계 ‘남해 상사바위’ 전설 남겨

 

정신질환 첫 부인 이혼하고 우찬성 손녀와 재혼하지만
기생과 계집종, 궁중 노비들과 수많은 염문 뿌려
여색에 빠져 학문과 담 쌓고 있자 세종이 마침내 결단

죽을 위기에 처한 궁중여인 가야지는 수양의 구명으로
남해 금산으로 유배가 메일 상사바위에 올라 기도
임양대군이 죽었다는 소문 듣고 바위서 투신해 자결

 

※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임영대군과 정분이 나 귀양간 가야지가 매일 올라 기도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상사바위’. 남해 금산 보리암 인근에 있다.(사진=남해군)
임영대군과 정분이 나 귀양간 가야지가 매일 올라 기도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상사바위’. 남해 금산 보리암 인근에 있다.(사진=남해군)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 큰며느리인 세자빈의 운명은 셋 모두 순탄치 못했음을 앞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적자 8명의 아들 군부인은 어떠했을까? 둘째아들 수양대군의 군부인과 셋째아들 안평대군의 군부인 이야기는 계유정난 이야기에서 따로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넷째아들 임영대군과 군부인 이야기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임영대군과 부인 남씨

임영대군 이구(李璆)는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무예가 뛰어나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겨하였으며 여덟 형제 중에서 수양대군과 성향이 비슷하여 유달리 친하게 지냈다. 14살이 되던 해, 그는 개국공신의 후손인 남지의 딸과 혼인하였다. 남지는 딸 둘을 두었는데 장녀는 임영대군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안평대군의 며느리가 되었으니 두 자매는 출가하여 시숙모와 질부의 관계가 된 셈이다.

부인 남씨는 12살이 지났는데도 소변을 가리지 못하였고 눈빛이 바르지 못한데다가 혀가 심히 짧아 말이 어눌하며 정신질환을 보이기도 하였다. 의령 남씨 집안의 가문만 보고 임영대군의 배필로 삼은 세종은 며느리 문제를 두고 또 한 번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삼정승을 불러 논의를 했다.


「 임금께서 전교하시길, ‘악한 병이 있으면 버리고, 부모에게 불순하면 버린다’고 옛 사람이 말하였으나, 동궁(세자)이 아내를 버렸는데 또 임영대군이 아내를 버리는 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영의정 황희 등이 아뢰길, 부부는 일생을 같이할 사람인데 이와 같은 몹쓸 병이 있는 사람을 어찌 대군의 배필로 삼겠습니까? 그 아비 남지가 애초에 병을 고하지 아니하였으니, 죄가 작지 아니하나 이제야 따져 무엇 하겠나이까? 그 조부 남경문(南景文)이 미친병이 있었고, 남지의 장인 이문알(李文斡)의 친족에도 이 병이 있었으니, 속히 내어보내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 6월 14일 기사 중에서


위 실록을 보더라도 군부인 남씨는 친가, 외가에서 비슷한 병 경력을 지닌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전적으로 타고난 병인 듯하다. 그래서 대신들은 이혼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세종에게 건의를 하였다.

그러나 임영대군의 어머니 소헌왕후의 생각은 달랐다.

“어진 아내를 얻어 살면 되지 하필 버릴 것이냐?”

큰며느리인 세자빈 휘빈 김씨나 순빈 봉씨를 내쫓을 때만 해도 적극적이었던 소헌왕후도 며느리 남씨를 내쫓지 않는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씨를 그대로 두되 어진 며느리를 다시 맞이하려는 절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본부인을 두고 새로이 부인을 맞이한다면 신분이 측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혼인한 지 한 달 만에 임영대군은 남씨와 이혼을 했다. 남씨를 내보내고 세종은 중전과 함께 처녀 11명을 궁중으로 불러 임영대군의 배필을 골랐다. 임영대군의 배필로는 의정부 우찬성 최사강의 손녀이자 요절한 최승녕의 딸이 간택되었다. 그녀가 제안부부인 최씨이다.

2. 문란한 여성 관계

부부인 최씨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임영대군은 악공의 딸인 기생 금강매와 사랑에 빠졌다. 이때가 그의 나이 19살이었다. 일찍이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그의 동생 광평대군 집 계집종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조정이나 왕실의 분위기는 계집종을 첩으로 들이기에는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반대를 했다. 그러나 세종은 쾌히 안평대군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임영대군이 기생 금강매를 첩으로 들이고 싶다고 세종에게 고하니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측은히 여겨서 이를 허락했다. 사실 세종으로선 안평대군의 일 때에도 승낙해 주었기 때문에 임영대군의 뜻을 뿌리칠 명분이 없었다. 그러자 승지 허후 등이 미천한 신분의 여자를 첩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를 하였다. 하지만 세종은 종사를 튼튼히 하는 일이라며 끝내 아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임영대군은 내자시의 여종 막비(莫非)와 사통하였으며 중궁 시녀 금질지(金叱知)와도 사통하였다. 임영대군의 문란한 여성 관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상의원에서 일하는 노비 가야지(加也之)에게 마음을 뺏겨 아이까지 갖게 했다. 문제는 그의 문란한 여성관계가 아니라 여색에 빠져 학문과 담을 쌓고 있다는 점이었다.

세종으로서는 더 이상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세종은 결단을 내렸다. 아들의 곁에 머무는 여인들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첩으로 들인 기생 금강매는 고향 공주로 내려보내고, 막비와 금질지는 다시 노역장의 종으로 보냈다. 가야지에게는 남해로 유배를 보내는 가장 중한 형벌을 내렸다.

3. 가야지의 운명은?

남해 금산에 가면 조화바위가 있다. 상사암 가장자리에 위치한 조그마한 바위가 바로 조화바위이다. 이 조화바위에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온다. 세종대왕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이 사랑했던 여인, 가야지에 대한 전설이다.

임영대군이 어느 날 밤에 궁중 뜰을 거닐고 있었는데 멀리 우물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끌려 발길을 옮기고 보니 한 여인이 우물가에서 속이 비치는 무희복을 입고 춤을 추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7살에 궁에 들어와 17살이 되기까지 허드렛일만 해 오던 무수리 가야지(加也之)였다.

그들은 1년이 넘게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궁중의 여인은 모두 임금의 여인이었다. 임금의 여인을 범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몰래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궁중은 벽에도 귀가 달려 있고 천정에도 귀가 달려있다는 곳이었으니 비밀한 사랑은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의 비밀한 사랑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가야지는 사약을 받게 된다.

임영대군으로선 믿고 의지할 곳이라곤 형인 수양대군밖에 없었다. 그는 수양대군에게 달려가 가야지를 살려만 달라고 애원을 했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가야지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다행스럽게도 수양대군의 노력으로 사사를 면한 가야지는 머나먼 남녘 땅 남해로 귀양을 가게 된다.

가야지는 이곳 남해 금산에다 초옥을 짓고 사랑하는 님 임영대군을 그리며 매일매일 이 상사바위에 올라와서 기도를 드렸다. 평생동안 사무치게 대군을 그리워하다가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임영대군의 죽음 소식을 들은 그녀는 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고 한다.

여색을 멀리하지 못하고 학문을 게을리하는 임영대군에게 세종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대군의 직첩을 회수하고 먼 변방으로 내치기까지 하였다. 1년이 지난 뒤 복권하게 되지만 오래지 않아 또 사고를 쳤다. 궐 밖의 여인 2명을 남복(男服)으로 변장하여 몰래 궁 안에 들이려다가 광화문 문지기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임영대군은 이 일로 재산과 대군 직첩을 다시 빼앗기고 3년 가까이 대궐 안에 연금되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해, 그는 수양대군을 지지했다. 형인 안평대군이나 동생 금성대군이 단종을 위해 충절을 다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에 비하면 그는 수양대군의 권력을 등에 업고 부귀를 누리다가 50세에 죽었으니 다른 형제들에 비해 비교적 장수를 누린 셈이다. 그는 부부인 최씨와의 사이에서 5남 2녀를 두었고 측실에서 4남 5녀를 더 두었다.

다음 이야기는 < 막내아들 영응대군 두 번 이혼을 하다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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