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1년 가야산으로 옮긴 단종 태실은 계유정난 후 파괴

 

세조실록에 ‘예조에서 금성대군 유(瑜)와 노산군(단종)의 태실을
철거하라는 주청을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
영조때 파괴된 태실 석물을 모아 원래 자리(성주 선석산)에 복원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438번지에 있는 단종태실지는
영조때 소실된 태실 복원시 지방수령의 구전보고로 등장
세종 태실지 부근에 위치 세종의 손자사랑 이야기로 각색 추정

 

※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문종 1년에 단종 태실을 가야산으로 옮겼다. 그때 석물을 주위에 흩어두었는데 그것을 모아 원래 자리에 복원하였다. 따라서 태실 안에는 단종의 태실이 없다. 소재지 :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지(사진=성주시)
문종 1년에 단종 태실을 가야산으로 옮겼다. 그때 석물을 주위에 흩어두었는데 그것을 모아 원래 자리에 복원하였다. 따라서 태실 안에는 단종의 태실이 없다. 소재지 :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지(사진=성주시)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 단종의 태실은 성주 선석산에 조성된 세종대왕자태실지에서 가야산으로 옮겨놓았는데 세조는 그것마저 집권 후에 없애버렸다. 그런데 단종의 태실이 경남 사천시 곤명면에 또 있다니 대체 무슨 연유일까?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438번지에 있는 태실은 현재 경남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야산에 있던 단종 태실을 곤명면으로 몰래 옮긴 것일까?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단종의 태실이 최초로 조성된 곳은 선석산 세종대왕자태실 자리가 확실하고 문종 때 가야산으로 옮긴 것까지 실록에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 세종실록 25년 12월 11일 기사

처음에 원손의 태를 경상도 성주에 안치하였는데, 거기에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이미 있었으니 바로 성원군(星原君) 이정녕(李正寧)의 시조였다.

2) 문종실록 1년 3월 6일 기사

안태사(安胎使) 예조 판서 허후(許詡)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이제 세자의 태실을 가야산에 옮겨 모시고 그 사방에 표를 세우고, 또 품관(品官) 이효진(李孝眞) 등 여덟 사람과 백성 김도자(金道者) 등 여섯 사람을 정하여 수호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선석산에 있던 단종의 태실이 가야산 자락 법림산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세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이 기록에 의하면 법림산으로 옮겨진 단종의 태실을 세조가 집권한 뒤 파괴해 버렸음을 알 수 있다.

항공사진에 표시해본 사천 곤명의 세종태실지와 단종태실지의 위치. 세종대왕이 사랑하는 손자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에 비롯된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사진=사천시)
항공사진에 표시해본 사천 곤명의 세종태실지와 단종태실지의 위치. 세종대왕이 사랑하는 손자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에 비롯된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사진=사천시)

예조에서 아뢰기를,

“법림산에 노산군(단종)의 태실이 있으니, 청컨대 여러 대군과 여러 군의 태실을 옮기고, 금성대군 유(瑜)와 노산군의 태실은 철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세조실록 4년 7월 8일>

그러던 단종의 태실이 느닷없이 사천시 곤명면에 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산군으로 신분이 강등되었던 단종은 죽은 지 243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에 복위되었다. 그리고 영조가 즉위하자 그는 지금까지 소실된 태실의 자료를 보완하고 정비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전국 각 지방의 감사와 수령에게 관할 구역의 태실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이때 사천지역의 수령이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단종의 태실이 있다고 보고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민간에서 내려오는 구전을 그대로 조정에 보고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당시 사천지역에는 ‘세종이 원손인 단종을 너무 아끼고 사랑해서 자신의 태실 가까이에 단종의 태실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천지역에서 보고한 내용을 사실로 믿고 태실 정비에 나선다. 따라서 영조 이후부터 단종의 태실은 경남 사천에 있는 것으로 기록된다.

세종대왕·단종대왕의 태봉은 경상도 곤양에 있는데 (중략) 표석(標石)이 이지러져서 고쳐야 됨으로, 예조 당상과 선공감역(繕工監役) 각 한 사람을 보내서 일을 감독하게 할 것을 명하였으니(이하 생략). <영조실록 10년 7월 11일>

그렇다면 단종 태실이라고 전해져 오는 경남기념물 제31호의 태실 주인은 누구일까?

1929년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조선 왕족의 태실 54기를 서삼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201-99)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명당을 훼손하여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때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있던 세종의 태실과 단종의 태실도 해체하였는데 단종의 태실이라고 전해져 온 그 태실에서 인성대군(예종의 아들, 3세에 요절)의 태실임을 알게 해 주는 지석(誌石)이 출토되었다. 지석이란 태실 속에 주인의 이름, 신분, 생년월일 등의 인적사항을 새겨놓은 돌을 말하는데 이로 인하여 태실의 주인은 단종이 아니라 인성대군임이 밝혀진 셈이다. 그래서 서삼릉으로 태실을 옮길 때 인성대군의 태실로 바로잡아 옮겼다. 그래서 현재 서삼릉 태실지에는 단종의 태실은 없고 인성대군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75년 경상남도가 단종 태실지를 문화재로 지정 신청을 할 당시에는 영조실록의 단종 태실 개보수에 관한 기록과 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에 근거하여 단종 태실을 문화재로 신청하게 되었다.

이 신청에 대하여 당시 실제 단종 태실 관할청인 성주에서는 단종 태실에 대한 이의제기가 없었다. 그래서 쉽게 경상남도 문화재로 승인이 났다.

그런데 1999년 사단법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발행한 ‘조선의 태실’이라는 책에서 경남 사천에 있는 태실은 결단코 단종의 태실이 아니라고 주장해 한때 논란이 되기도 했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기록의 오류와 와전으로 인해 인성대군의 태실이 단종의 태실로 둔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이 단종의 태실지였음을 굳게 믿고 있다.

가장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이 가장 사랑하는 손자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을 백성들이 대신 표현한 것이 아니라면 단종의 태실이 세조에 의해 파괴되지 않고 온전히 전해지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다음 이야기는 < 문종의 딸 경혜공주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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