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문종>
할아버지·아버지로부터 사랑받았지만 문종 사후 기구한 삶

 

세자(훗날 문종)의 후궁(권씨)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대반전
앞서 두 빈이 후사가 없자 세종이 권씨를 세자빈으로 책봉
출산경험이 책봉 이유…어머니를 세자빈으로 올린 ‘복덩이’
대개 10세 전후 혼인하여 출궁하지만 계속 궁에서 생활
할아버지 세종 건강이 악화되자 경혜공주 혼사 서둘러
경혜공주 열다섯살 때 형조참판 지낸 정충경 아들 정종과 혼인

 

※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경혜공주_배우 홍수현이 경혜공주 역을 맡았다.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경혜공주_배우 홍수현이 경혜공주 역을 맡았다.(사진=KBS)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 경혜공주는 문종과 현덕왕후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써 단종의 누이이기도 하다. 문종이 재위 3년만인 39세에 승하하였는데 경혜공주도 문종이 살았던 그 나이(39세)만큼만 살고 죽었다.


1. 경혜공주, 어머니를 세자빈으로 만들다


경혜공주(敬惠公主)는 세종 18년에 세자(훗날 문종)의 후궁이었던 권씨에게서 태어났다.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가 후사 없이 궁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세종으로서는 왕손을 빨리 생산해 줄 새 세자빈이 필요했다. 그때 후궁 권씨는 이미 슬하에 딸(훗날 경혜공주)을 두고 있었다. 딸을 낳았으니 아들도 못 낳을까 그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후궁 권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결국 경혜공주는 어머니를 세자빈으로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어머니 현덕왕후는 공주가 6살이 되던 해 동생 단종을 출산하고 하루 만에 숨을 거둔다. 그래서 공주는 어린 시절, 판관(判官)을 지낸 조유례(趙由禮)의 집에 피접을 나가 살곤 했다. 액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덕이 많은 대신을 골라 그 집으로 피접을 보내는 일은 당시 왕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조유례는 경혜공주를 돌봐준 공덕으로 문종 1년에 중추원부사까지 올랐는데 훗날 수양대군이 그를 금성대군의 역모 사건에 연루시켜 죽였으니 그 역시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다.

문종은 다른 왕자들에 비해 외모 면에서도 상당한 상남자였고, 미색이 출중한 현덕왕후도 후궁 시절 어떤 여인보다 문종의 총애를 많이 받았으니 그런 부모에서 태어난 공주 또한 상당한 미모를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경혜공주의 아름다운 미모는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딸 바보 문종만큼이나 세종도 경혜공주를 아끼고 사랑했다. 대개의 공주는 10살 전후로 혼인을 하여 성인이 되면 출궁하게 되는데 경혜공주는 15살이 될 때까지 혼인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고 자라서 궁에 더 오래 두고 싶은 마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손녀딸을 빨리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세종의 마음이 그런 것이었는지 모른다.

경혜공주 14살이던 해 늦가을부터 세종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었다. 그러자 세종은 서둘러 손녀딸의 혼사를 진행했다.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면 경혜공주의 혼사는 3년 뒤로 미루어질 수도 있는 일. 그래서 손녀딸의 혼사를 서둘렀던 것이다.

2. 꿈 같이 만난 그대

경혜공주의 배필은 형조참판을 지낸 정충경의 아들 정종(鄭悰)으로 정해졌다. 그의 고모는 효령대군(세종의 형)의 부인이었고, 누이는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부인이었으니 그의 가문은 두 명이나 왕실의 대군에게 출가한 명문 집안이었다.

세종은 손녀딸의 혼례를 치르기 전에 정종에게 미리 종2품인 순의대부(順義大夫) 관직을 내리고 그해 1월, 공주의 나이 열다섯에 혼례를 치렀다.

그러나 혼례의 기쁨도 잠시.

혼례를 치른 지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세종은 숨을 거두었다. 사랑하는 손녀딸에게 베푼 마지막 선물이었다. 할아버지로부터 많은 사랑은 받았던 경혜공주는 세종의 죽음 앞에서 절규했다.


3. 문종의 즉위와 경혜공주의 출궁


공주가 혼인을 하면 곧바로 궁궐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몇 년 더 살다가 성년이 되면 16살쯤에 출궁하는 것이 관례였다. 출궁하더라도 시댁으로 가지 않고 왕실에서 별도로 살림집을 장만해줬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공주의 살림집은 50칸 이내로 규정하고 있다. 집을 새로 짓거나 다른 사람의 집을 매입해서 수리하는 게 관행이었다.

문종은 딸을 위해 대궐에서 비교적 가까운 양덕방(陽德坊, 현재의 종로구 가회동 일대)에 신혼집을 마련해 주었다. 민가 40여 채가 헐리는 큰 공사였다. 조정 신료들은 백성들이 부담해야 할 많은 노역을 이유로 공사를 반대했다. 대신 다른 곳의 민가를 매입해서 집을 개조하자는 쪽으로 건의를 했다. 하지만 문종의 주장은 단호했다.


“도성 안은 민가가 조밀하여 진실로 빈 땅이 없는데, 그렇다면 왕자·왕녀가 도성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문종실록> 문종 1년 4월 3일 기사 중에서


조정은 이 일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백성들이 집을 잃고 쫓겨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문종의 생각은 달랐다. 양덕방 일대가 백성들이 사는 동네라면 당연히 민가를 헐어서는 안 되지만 그곳은 높은 벼슬아치들이 사는 곳이어서 헐더라도 이들에게는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문종은 딸 바보답게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공사를 진행시켰다. 처음의 계획보다 더 많은 40여 채의 민가를 헐어 살림집을 마련해 주었다.


4. 공주, 옹주, 군주, 현주의 차이

왕가의 딸에 대한 호칭은 조선이 개국된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명칭을 사용하다가 세종 때에 와서 거의 정비되었다. 출생 환경에 따라 6가지의 호칭을 달리 썼다.

● 공주
임금의 딸 중에서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즉 왕의 적녀에게 붙이는 호칭
● 옹주
임금의 후궁에서 태어난 딸, 즉 왕의 서녀에게 부르는 호칭. 세자와 세자빈 사이에서 태어난 딸, 즉 세자의 적녀에게 부르는 호칭으로 후에 세자가 임금이 되면 공주로 승격된다. 또한 대군의 정실에서 태어난 딸도 군주라 부른다.
● 현주
세자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딸, 즉 세자의 서녀에게 부르는 호칭으로 후에 세자가 임금이 되면 옹주로 승격된다.
● 기타
여러 군의 정실의 딸과 대군의 아들의 딸은 향주(鄕主)라 칭하고, 그 나머지 종실의 딸은 모두 정주(亭主)라 칭한다.
● 품계
공주와 옹주는 왕비, 대비처럼 품계가 없는 무품으로 품계를 초월한 왕실의 최상위 계층에 속한다. 공주와 옹주는 남편의 직책에 따라 경제적 녹봉과 토지를 받는데, 남편이 죽어도 살아 있을 당시의 남편 직책에 맞는 대접을 받는다. 거기에 비해 군주는 정2품, 현주는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대우와 녹봉을 받는다.


5. 경혜공주의 호칭

문종은 일찍이 세자 시절 세자빈 김씨와 혼인하였는데 자녀가 없이 이혼하였다. 그리고 봉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는데 봉씨도 행실이 부정하다 하여 쫓겨나고 말았다. 그때 후궁이었던 권씨에게 딸 경혜공주가 있었는데 그때는 공주가 아니라 현주였다. 지역 명칭을 현주 앞에 넣어서 이름을 불렀는데 그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사료에는 남아 있지 않다.

세자빈 김씨, 봉씨에 이어 후궁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하게 되자 그 딸은 군주가 된다. 현주나 군주는 지역 이름을 군주, 현주 앞에 붙여 부르게 되는데 따라서 경혜공주는 강원도 평창군의 지명을 따서 평창군주라 불렀다.

세종이 승하하고 세자가 조선 6대 임금으로 오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문종이다. 따라서 평창군주는 아버지 문종이 임금이 되니 신분이 상승하여 공주가 되었다. 현주나 군주의 경우 지역명칭을 현주, 군주 앞에 붙이게 되지만 공주가 되면 지역 이름으로 이름을 짓지 않고 예쁜 이름을 사용한다. 따라서 경혜라는 이름을 지어 경혜공주라 불렀다.

따라서 현주, 군주, 공주의 단계를 모두 거친 경우는 경혜공주가 유일하다고 하겠다.

그녀의 삶은 세조에게 박해를 받으면서 기구한 삶을 살았다. 그녀의 아픈 삶은 뒷 이야기에서 다루고자 한다.

다음 이야기는 < 준비된 왕, 문종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관련기사

키워드

#장편소설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