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무오사화) - 74화 김일손, 효성과 청렴을 높여서 교화(敎化)를 도탑게 할 것을 상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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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무오사화) - 74화 김일손, 효성과 청렴을 높여서 교화(敎化)를 도탑게 할 것을 상소하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1.2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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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상소 26개 조목 중 12번째 조목은 “효렴(孝廉:효성과 청렴)을 높여서 교화(敎化)를 도탑게 하소서.”이다.

“옛날에 어진 인재를 천거할 때는 덕행(德行)을 앞세웠는데 후세의 과거(科擧)는 문예(文藝)를 숭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시문(詩文)에만 쏠려 바른 학문을 알지 못하고, 간혹 옛 법대로 조행(操行)을 삼가는 이가 있으면 여러 사람이 비웃고 희롱하니, 날로 사리에 어둡고 괴이해집니다. 대개 독행(篤行)하는 선비는 두루 통하지 못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의 훌륭한 제자로 고시(高柴 효성이 지극하여 상중(喪中)에 3년간을 슬피 울고 전혀 웃지 않았다 함)같은 효자도 어리석다는 평가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근세에 효행(孝行)으로써 천거된 자가 벼슬하여 일에 임할 경우 처리하는 재주가 없으므로 세상에서 드디어 효자를 쓰지 못할 것이라 하니 진실로 한탄스럽습니다. 한(漢)나라 이래로 효성과 청렴한 자의 천거가 폐지되지 아니하였고, 명(明)나라 관제(官制)에도 효렴(효성과 청렴)을 과거(科擧)와 함께 두어 기용하였습니다.

대개 백성을 효도로써 가르치는 것인데, 효자를 다 등용할 수 없으나, 가정(家庭)에서 힘써 행하여 향리(鄕里)에 나타나게 일컬어지는 것은 나이가 사오십이 아니면 들리지 못하는 것인데, 예(例)에 의하여 9품 벼슬만을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 장원(壯元)은 일장(一場)의 책문(策問)으로 당장 6품에 오릅니다. 장원은 두고라도, 문음(門蔭) 같은 것도 처음에 칭찬할 만한 한 가지 착한 것도 없는데도 월등하게 임명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청주(淸州) 생원(生員) 경연(慶延)은 효도로써 선조(先朝)에 천거되어 곧 주부(主簿)를 제수하였고, 그 다음에 이산현감(尼山縣監)으로 임명하였는데, 죽은 뒤에 백성들이 이제까지 그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으니, 신은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효도로써 천거된 자가 만약 학식이 있거든, 한결같이 경연의 예(例)에 의하여 다 6품직을 주고, 감사(監司)에게 책임을 지워 해마다 한두 사람씩 그 자질에 따라 그 행실을 등급 매겨 장려(奬勵)하여 교화(敎化)를 도탑게 하소서.

세상에서는 효도를 혹 읍죽(泣竹 중국의 효자 고시(高柴)의 일인데 어머니가 죽순(竹筍)을 즐겨 먹는데, 겨울이라 구할 수 없으므로 대밭에서 걱정하고 있으니 죽순이 별안간 솟아 나왔다 함.)과 할기(割肌 부모의 병에 자기의 살을 베어서 약으로 드렸다는 말인데, 이것은 고금에 한두 사람이 아니다.)의 특이한 데서 구합니다.

그렇다면 증삼(曾參)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 악정(樂正)이 발을 다쳐 근심한 것(노(魯)나라 증자(曾子)의 제자 악정자춘(樂正子春)은 효자로써 행보하다가 발을 다쳤는데, 부모가 물려주신 것을 다쳤다고 자책하고 두어 달을 출입하지 않았다 함)은 효도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 효도라 하였으니 누군들 부모가 없겠습니까. 잘 섬기면 사람마다 다 효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조(聖朝)의 교화(敎化)로 효자가 많은 것이 어찌 걱정이겠습니까.”

이어서 상소의 13번째 조목은 ‘염퇴(恬退)하는 이를 우대하고 분경(奔競)을 억제해야 합니다.’이다.

“요즈음 벼슬길에 들어선 선비들이 처음부터 실력이 없건만 오직 조급하게 승진할 것만 알고, 벼슬에서 물러날 나이가 되어도 오히려 나이를 속이고 녹(祿)을 받으며, 권세와 이익에만 붙좇는 것만 배우고 염치를 말하기를 꺼려하며, 때를 놓치지 않고 분주하게 밤중에도 벼슬자리를 구걸하려 다니니, 이조와 병조에서는 그러한 분경(奔競)에 견딜 수 없고, 산림에 은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분경(奔競)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벼슬을 얻기 위해 인사권자의 집에 분주하게 드나들며 인사 청탁을 하는 것이다.

1470년(성종 1)에 분경의 금지 대상이 확정되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이에 의하면 이조·병조의 제장(諸將)과 당상관, 이방·병방의 승지, 사헌부·사간원의 관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의 집에 동성 8촌 이내, 이성(異姓)·처친(妻親) 6촌 이내, 혼인한 가문, 이웃 사람 등이 아니면서 출입하는 자는 분경자로 간주되어 100대의 곤장을 맞고 3,000리 밖으로 유배당하게 규정되어 있다.

사실 이 규정은 매우 폐쇄적인 법제여서 많은 한계가 노정되었다. 또한 관료들이 표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몰래 청탁하고 행적을 감추기 때문에 별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상소는 계속된다.

“혹 은퇴하는 자가 있어도 사대부(士大夫)들 또한 그리 가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아침에 경상(卿相)이 되었을 적에는 거마(車馬)가 거리를 메웠다가 저녁에 벼슬을 그만두고 도문(都門)을 나서면 송별하는 장막(帳幕)이 없으니, 이는 소광(疏廣)·소수(疏受), 양거원(楊巨源)의 행차와는 다르고, 고향에 돌아가면 사람들이 앞날이 없다 하여 더 이상 공경하지 않으니, 풍속이 이러합니다.”

소광(疏廣)은 한나라의 유학자로 기원전 67년 선제(宣帝)때 황태자의 태부(太傅)로 있었는데, 5년이 지나자 관직과 명성이 높아졌다. 그는 지금 떠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하면서 숙질인 소수(疏受)와 같이 사퇴하고 장안의 동쪽 성문에서 고관들의 전송을 받고 낙향했다. 양거원(楊巨源)은 당나라 시인으로 70세에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돌아갔다.

“이제부터 벼슬에 물러날 것을 청하는 자가 있거든 비록 녹(祿)은 주지 못하나 연수와 품계에 구애됨이 없이 전정(田丁)을 복호(復戶)하여 주고 품계를 올려 주어 그 돌아가는 것을 우대하소서.”

연산군 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사진=김세곤)
연산군 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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