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5년 5월28일에 충청도사 김일손은 26개 조목을 조목조목 간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상소를 마무리한다.

“신이 진술한 26가지 일은 모두 적당한 시기에 맞춰 추진할 일입니다.심히 고론(高論)이 아니어서 얼핏 보면 쓸데없는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이치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대부분 선대 임금 때에 시도했던 것이기 때문에 조금만 빼고 보태면 시행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하께서 양단(兩端)을 잡아 중간(中)을 쓰시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 요체는 하루빨리 경연(經筵)에 납시는 데 있습니다. 학문이 날로 나아가면 덕이 날로 밝아지고, 스스로 덕을 밝히면 만사가 차차 이치에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김일손은 연산군에게 하루빨리 경연에 납시라고 간언한다. 김일손이 간언하기 한 달 전인 4월19일에도 홍문관과 노사신이 경연에 납시기를 청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4월19일)

“홍문관에서 경연(經筵)에 납시기를 청하고, 노사신도 ‘졸곡(卒哭)이 이미 지났으니, 빨리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강하셔야 하고, 또 전하께서 전일에 강의를 다 끝내지 못한 《대학연의(大學衍義)》는 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도가 갖추어 실리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 두 서적을 강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옳은 말이다. 다만 중국 사신이 오기 전에 침구(針灸)를 하고 싶다." 하였다. ”

이를 보면 연산군은 딴전을 피우고 있다. 중국 사신이 오기 전에 침구 해야 하므로 경연에 참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폭군 연산군(1476∼1506). 그는 세자 때부터 서연(書筵)을 싫어했다.*  1493년(성종 24) 11월 12일의 <성종실록>에 나온다.

* 서연(書筵)은 조선시대 왕세자를 위한 교육 제도이다. 차기 국왕으로서의 왕세자에게 경사(經史)를 강론해 유교적인 소양을 쌓게 하는 교육의 장이었고, 강학과 보도(輔導)의 기능이 있었다. 담당관서는 세자 시강원(世子 侍講院)이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양희지(楊熙止)가 아뢰기를, "요사이 세자께서 강학(講學)을 하다 말다 하시고, 또 서연(書筵)은 단지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만 대(對)하시고, 강(講)이 끝나면 곧 동궁으로 돌아가시어 환관이나 궁첩(宮妾)들과 더불어 친하게 지내시니, 어찌 선비들과 더불어 강마(講劘)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이러자 성종이 말하기를, "세자는 지금도 여전히 문리(文理)를 통하지 못하고 있으니, 강관(講官)과 더불어 오랫동안 대하여 강론(講論)하는 것이 매우 마땅하다." 하였다.

헌납(獻納) 홍한(洪瀚)은 아뢰기를,

"신이 전에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는데, 세자께서 의심스런 곳이 있으면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글로 써서 물어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관은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니 어찌 다 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고,

특진관 정문형은 아뢰기를, "세자께서는 진실로 마땅히 좌우와 더불어 전후로 학문을 강론하셔야 할 것이고, 주강을 오래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성종이 말하기를, "이 말이 옳다." 하였다.”

이렇게 연산군의 학습 태도는 상당히 불량함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2월20일에도 연산군의 학문 수준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특진관 성현(成俔)이 아뢰기를, "세자의 서연(書筵)에서 《대학집주(大學集註)》를 진강(進講)하게 하는데, 신이 생각하건대, 집주(集註)는 포괄적이어서 의론과 의미가 다르므로 진실로 문리(文理)에 크게 통달(通達)한 자가 아니면 그 귀추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집주를 강(講)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可)하다."

하였다. (성종실록 1493년 12월 20일)**

** 연산군은 1483년 2월 6일 7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어 1494년 12월24일에 성종이 붕어하자, 닷새 뒤인 12월29일에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던 11년 동안의 학문적 자질은 학습 태도가 느슨하고 이해력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김범 지음, 연산군, 글항아리, 2010, p82-93)

연산군 묘소 입구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소재) (사진=김세곤)
연산군 묘소 입구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소재) (사진=김세곤)
연산군 묘 (묘비에는 ‘연산군지묘 燕山君之墓’라 적혀 있음)  (사진=김세곤)
연산군 묘 (묘비에는 ‘연산군지묘 燕山君之墓’라 적혀 있음)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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