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코너에서 연재하는 이야기는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속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을 돋보기로 확대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빈청서 단종 주변 인물들 제거하는 치밀한 계획 세워
동생 김종서 등 많은 충신들 죽이고 얻은 임금 자리

세조 즉위하던 날 단종 지킨 충신들 영원히 귀양떠나
금성대군·혜빈 양씨 사사되고 영양위 정종은 능지처참

정통성 없던 세조에게 충신들 수없이 도전했으나 실패
그럴 때마다 세조 피로써 그들 다스려, 공신들만 난무

세조 즉위 (영화 관상의 한 장면)_ 계유정난으로부터 시작된 수양대군의 야심은 이로써 	모두 마무리되었다. 수양대군은 곧바로 근정전으로 돌아와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했	다. 동생을 죽이고 김종서 등 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얻은 피의 대가였다.
세조 즉위 (영화 관상의 한 장면)_ 계유정난으로부터 시작된 수양대군의 야심은 이로써 모두 마무리되었다. 수양대군은 곧바로 근정전으로 돌아와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했 다. 동생을 죽이고 김종서 등 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얻은 피의 대가였다.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원찬 작가]

1. 성삼문의 통곡

1455년 윤6월 11일 빈청에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그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단종을 지키고 있는 마지막 인물들을 제거하는 일을 논하는 자리였다. 세종의 6남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 단종의 매형이자 경혜공주의 남편인 영양위 정종, 세종의 후궁이자 단종의 양어머니 역할을 했던 혜빈 양씨, 그리고 그 아들들이 제거 대상의 중심 인물이었다. 수양대군 사람들이 대전으로 나아가 단종을 겁박하는 동안 수양대군은 경회루로 향했다. 넷째 동생을 제거하고 아버지 세종의 후궁을 제거하는 자리이며 조카사위를 제거하는 자리였다. 그런 역사적인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경회루로 피해 있었지만 남자답고 호걸답다는 수양대군의 이미지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비열하고 몰염치한 그런 모습이 수양대군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단종으로 하여금 경회루로 직접 찾아와 양위를 하도록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까.

임금을 지키려 끝까지 몸부림치던 이들을 모두 귀양 조치하고 단종은 성삼문으로 하여금 옥쇄를 받들게 하여 경회루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양대군에게 선위의 뜻을 전했다. 그런데 만조백관이 늘어선 대전을 놔두고 수양대군은 왜 이곳을 선위 받는 장소로 선택한 것일까?
만일 대전에서 만조백관을 앞에 두고 양위를 한다면 수양대군은 절대로 왕위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양위를 반대하는 충신들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위의 의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 있다. 비록 양위의 대상이 세자일지라도 세자는 부왕에게 석고대죄를 청해 용서를 구하는 사례가 많은데 하물며 선위의 대상이 숙부라면 그것은 더욱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수양대군은 스스로 자신의 역심을 들어내는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만조백관을 대전에 묶어두고 경회루에서 선위 받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수양대군은 몇 번을 사양하는 체하다가 마침내 선위를 받아들였다. 그 순간 옥쇄를 들고 갔던 성삼문이 대성통곡을 했다. 수양대군으로서는 성삼문의 행동이 불쾌하기 그지없었으리라.

그 순간의 장면을 스냅사진처럼 <연려실기술>은 기록하고 있다.


“성삼문이 옥쇄를 들고 경회루로 나아가 내관 전균에게 전하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세조가 엎드려 겸양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가 머리를 들어 빤히 쳐다보았다.”
<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고사본말 편 >

2. 정통성이 없는 세조

계유정난으로부터 시작된 수양대군의 야심은 이로써 모두 마무리되었다. 수양대군은 곧바로 근정전으로 돌아와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동생을 죽이고 김종서 등 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얻은 피의 대가였다. 쿠데타의 변(辯)이 모두 그러하듯 세조 역시 자기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그의 즉위교서에서 밝히고 있다.

“덕없는 내가 선왕(문종)과는 한 어머니의 아우이고 또 자그마한 공로가 있었기에 여러 대군 중에서 장자이니 내가 아니면 이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진정시킬 길이 없다고 하여 드디어 보위를 나에게 주시니 이를 굳게 사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또 종친과 대신들도 모두 이르기를 종사의 대계로 보아 의리상 사양할 수 없다고 하는지라, 억지로 여론을 좇아 경태(景泰) 6년 윤6월 11일에 근정전에서 즉위하고, 주상을 높여 상왕으로 받들고자 하노라.”

<세조실록> 세조 1년 윤6월 11일 기사 중에서

세조가 즉위하던 날 단종을 지키던 충신들은 쓸쓸이 귀양을 떠났다. 그 길은 귀양길이 아니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길, 저승으로 가는 죽음의 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훗날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는 사사되고 영양위 정종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비록 용상에 오르긴 했지만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얻은 옥좌이기에 세조에게 가장 큰 콤플렉스는 정통성 문제였다. 원손, 세손, 세자를 거처 왕위에 오른 단종은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지닌 임금이었다. 그래서 세조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피의 숙청을 자행해야만 했다. 그가 재위 14년 동안 죽인 사람은 폭군이라 일컫는 연산군, 광해군 시절보다 더 많다. 특히 가장 잔인한 죽음이라 일컫는 형벌 중에 능지처참 형을 꼽는데 그것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도 세조 때에 가장 많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세조의 죽음> 편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3. 정통성을 향한 세조의 몸부림

임금의 묘호는 조(祖)와 종(宗)으로 구분된다. 조(祖)는 나라를 세운 창업군주에게만 허용되는 묘호이다. 그래서 조선 왕조에게는 이성계에게만 조(祖)라는 묘호를 써서 태조라고 부르고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등 나머지 왕의 묘호는 모두 종(宗)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조(祖)를 썼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한 이래 단종에 이르러 김종서 등의 무리가 득세하여 나라가 그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위기에 처함에 수양대군이 분연히 일어나 왕권을 되찾았으니 이는 곧 조선을 다시 창업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세조와 그의 무리들은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창업군주에게나 붙이는 묘호인 조(祖)를 세조에게 붙이기 위한 구실이었다. 그것은 완벽한 정통성을 지닌 단종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런 피를 물려받은 때문일까? 이후 세조의 후손들이 조선왕조를 이었는데 너나할 것 없이 조(祖)를 붙이는 걸 보면 정말 무안후치라 아니할 수 없다. 임진왜란의 선조, 병자호란의 인조. 온 나라를 전쟁의 포화 속으로 밀어 넣은 못난 왕 선조와 인조. 가장 못난 왕 베스트에 넣어도 부족함이 없는 이들도 조(祖)를 붙였다. 나쁜 짓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도 배우는 습성을 세조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4. 충신들의 반격

정통성이 없던 세조에게 충신들의 도전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세조는 피로써 그들을 다스렸다. 그 결과 공신들만 난무하게 되었다. 계유정난 때 받은 정난공신 43명을 시작으로 사육신 사건을 다스린 46명의 공신과 이시애 난을 다스린 42명의 공신을 합하면 모두 131명 공신을 배출한 셈이다. 세조는 이들의 뒤에 숨어서 정치를 했다. 이런 상황을 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에서 잘 묘사해 내고 있다.

경혜공주는 더 이상 세조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속에 담고 있던 말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많이 약해지셨네요. 안평 숙부님을, 금성 숙부님을, 그리고 영양위 대감마저 역모로 몰아 죽일 때 그 위세는 어디가고 어찌 이렇게 약해지셨나요? 이러려고 임금이 되셨나요? 공신들 배불려 주고 전하께 남겨진 거라고는 한 맺힌 사람들의 원한밖에 없잖아요?”

“세조는 넋 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듣기만 하고 있었다. ”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289페이지에서 따옴

가장 먼저 일어난 충신들의 반격은 사육신 사건이다. 명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축하연을 벌이는 자리에서 성삼문 등 사육신이 중심이 되어 세조와 세자를 죽이기로 계획을 세운 사건을 말한다. 이 축하연에는 세조를 포함해 세자와 상왕(단종) 모두가 참석하는 자리였는데 임금을 호위하는 별운검에는 성승(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가 맡게 되었다. 세조를 제거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축하연을 코앞에 앞둔 시각. 한명회가 축하연 스케줄을 갑자기 변경했다. 장소가 비좁고 더운 관계로 별운검을 행사장에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최고의 중요 역할을 별운검이 맡았는데 별운검이 행사장에 들어갈 수 없다면 무슨 수로 세조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충신들은 당황했다. 성삼문, 박팽년 등은 거사를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주장하였고, 유응부는 무장답게 쇠뿔도 단김에 뽑자고 주장하였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 다음 이야기는 < 단종복위운동 > 편에서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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