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이 태종에게 올리는 간언은 계속된다.(태종실록 1401년 1월14일)

“가만히 보건대, 고려의 시중(侍中) 정몽주가 본래 한미(寒微)한 선비로서, 오로지 태상왕이 발탁하는 은혜를 입어서 높은 벼슬에 이르렀으니 그 마음이 어찌 태상왕께 후히 갚으려고 하지 않았겠으며, 또 재주와 식견의 밝음으로써 어찌 천명과 인심(人心)이 돌아가는 곳을 알지 못하였겠으며, 어찌 왕씨(王氏)의 위태하고 망하는 형세를 알지 못하였겠으며, 어찌 자기 몸이 보전되지 못할 것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섬기던 곳에 마음을 오로지하고 그 절조를 변하지 않아서 생명을 잃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이른바 대절(大節)에 임(臨)하여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통(韓通)이 후주(後周 951-960)를 위하여 죽었는데 송나라 태조(太祖)가 추증(追贈)하였고, 문천상(文天祥 남송 말기의 충신)이 송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또한 추증하였습니다. 정몽주가 고려를 위하여 죽었지만 추증할 수 없겠습니까.”

권근은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를 죽인 이가 태종 이방원임을 알면서도, 이런 간언을 했다니 참 용기있는 사람이다.

태종 이방원과 정몽주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시작하는 하여가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의 단심가로 널리 알려진 인연이었다. 정몽주를 회유하기 어렵다는 안 이방원은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개성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했다.

선죽교엔 지금도 정몽주의 피가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권근의 간언은 이어진다.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은 고려 때에 사헌 집의(司憲執義)이었는데, 태조께서 개국하시던 처음에 추대(推戴)하는 신하가 그와 친한 벗이 많으므로 그를 달래었으나 절개를 지키고 응하지 않았습니다.

명(明)나라에서 표사(表辭)가 공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장차 우리나라를 죄주려 하매, 태상왕의 명령을 받고 명나라 서울에 입조(入朝)하여 국문을 당하여 매질의 고통이 몹시 괴로왔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으므로, 황제가 이를 아름답게 여기어 그 죄를 석방하였는데, 뒤에 다른 연고로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그 절의 또한 높일 만합니다.

이 두 사람은 마땅히 봉증(封贈)을 가하고 자손을 녹용해야 합니다.”

권근의 건의가 있은 후 10개월 후에 태종은 정몽주·김약항에게 증직한다.

고려 문하시중 정몽주에게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광산군 김약항에게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증직(贈職)하였다. 참찬의정부사 권근의 말을 좇은 것이었다.(태종실록 1401년 11월 7일)

이어서 권근은 또 한 사람의 충절의 선비를 거론한다. 야은(冶隱) 길재(1353∼1419)이다.

“전 주서(注書) 길재(吉再)는 고절(苦節)이 있는 선비입니다. 전하께서 세자로 계실 때에 예전 교의(交誼)를 잊지 않으시고, 또 독실한 효도를 아름답게 여기시어, 상왕(上王)께 아뢰어 벼슬을 제수하셨는데, 길재가 일찍이 위조(僞朝)에 벼슬하였다고 하여 스스로 오늘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그가 시골로 돌아갈 것을 들어주시어서 그 뜻을 이루게 하였으니, 길재의 지키는 바가 비록 중도(中道)에 지나고 바른 것을 잃었다고는 하지마는, 혁명(革命)한 뒤에 오히려 예전 임금을 위하여 절개를 지키어 작록(爵祿)을 사양한 자는 오직 이 한 사람뿐입니다.

어찌 높은 선비가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다시 예(禮)로써 불러 작명(爵命)을 더하시고, 굳이 이전의 뜻을 지키어 오지 않는다면 그 고을로 하여금 정문(旌門)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게 하여 절의(節義)를 포상(褒賞)하는 법을 빛내게 하소서.”

길재는 1389년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1390년에 늙은 홀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갔다. 1391년에 안변(安邊) 등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부고를 듣고 3년 상을 행하였다.

1400년 7월 2일의 정종실록에는 길재의 평이 실려 있다.

“사신(史臣) 홍여강이 논한다. 생각컨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니, 신씨(辛氏 우왕)가 비록 위조(僞朝)이나 이미 폐백을 바쳐 신하가 되었고, 주서(注書)가 비록 미관(微官)이나 또한 종사하여 녹을 먹었으므로, 어떻게 위조(僞朝)와 미관(微官)이라 하여 신자(臣子)된 분수를 어길 수 있겠는가! (중략) 신씨가 망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 길재가 옛 임금을 위하여 절의를 지켜 공명을 뜬구름같이 여기고, 작록을 헌신짝같이 보아 초야에서 마치려 하였으니 참으로 충절의 선비라 하겠다.”

청계사 (경남 함양군 청게사원 내) (사진=김세곤)
청계사 (경남 함양군 청게사원 내) (사진=김세곤)
탁영 김선생 유허비  (청계서원 내) (사진=김세곤)
탁영 김선생 유허비 (청계서원 내) (사진=김세곤)
탁영 김선생 유허비문 일부 (사진=김세곤)
탁영 김선생 유허비문 일부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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