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시인 김시습 세조에 저항하다

세종 다섯 살 신동 김시습 대궐로 불러 시 짓게 해
그의 재주에 놀란 세종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려
세종으로부터 장래를 약속받은 김시습 학문에 매진

세종 손자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 뺏기자 세상 등져
울분으로 떠돌다 금오산서 최초소설 ‘금오신화’ 집필
세조에 저항하며 살던 삶 59세에 무량사서 숨 거둬

부여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 사리를 넣은 부도.
부여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 사리를 넣은 부도.

1. 신동의 탄생

김시습은 나면서부터 천품이 남달라 생후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고 한다. 말이 더디어 글을 볼 때 입으로는 읽지 못했으나 그 뜻은 모두 알았다. 아래는 세 살 때에 그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이다.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니 삼월이 저물었다. [桃紅柳錄三月暮]

구슬을 푸른 바늘로 꿰었으니 솔잎에 맺힌 이슬이라. [珠貫靑針松葉露]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 편


또 유모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아래 시를 지었다고 한다.


비도 안 오는데 우레 소리는 어디에서 울리는고. [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누나. [ 黃雲片片四方分]


다섯 살에 대학을 통하고 능히 글을 지으니, 신동(神童)이라고 이름이 났다. 정승 허조가 그 소문을 듣고 신동을 찾아갔다.

“내가 늙었으니 노(老)자로 시구를 지어 보아라.”

김시습을 즉시 화답했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 [老木開花心不老]”

허조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는 소문은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종은 즉시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부르게 하였다.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을 시켜 시험하기를,

“동자의 공부는 백학(白鶴)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도다. [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라고 하니, 김시습이 대답하기를,

“성주(聖主)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 가운데를 뒤집는 것 같습니다. [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

라고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세종이 전교하기를

“학문을 더욱 가르치고 길러 나이 장성하고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서 내가 장차 크게 쓰겠다.”

하고, 곧 비단 오십 필을 상으로 주어서 스스로 가지고 가게 하니 어린 김시습이 무거운 비단을 가지고 갈 수 없어 그 끝을 허리에 둘러 끌고 나갔다고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조선에 진동하여 이름 대신 오세(五歲-다섯 살)라고 불렸다.

2. 불행의 그림자

김시습은 세종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은 뒤 더욱 학업에 힘썼다. 비록 열세 살에 어머니를 여의는 아픔을 겪었지만 삼년상을 마친 뒤 남효예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을 이루기도 하였다. 장밋빛 인생을 그리며 학문에 매진하고 있던 중 그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세종이 훙(薨)고 이어 문종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세종의 적통인 단종이 3년 만에 왕위를 세조에게 빼앗기게 되자 그는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채 대성통곡을 했다. 읽고 쓰던 서책도 모조리 불살라 버렸고, 그 길로 절에 들어가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바꾸고 세상을 등진 채 은둔해 버렸다. 이때 김시습의 나이 21세였다. 잠시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궁궐 내불당에 머물면서 불경언해 사업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그는 10여 년 동안 전국으로 방황하면서 떠돌았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 있는 ‘금오신화’/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 있는 ‘금오신화’/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3. 울분 속에서 살았던 삶

그러다가 31살이 되던 해에 방랑을 끝내고 경주 금오산에 들어가 움막을 짓고 칩거했다. 6년 동안 이곳에서 칩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를 여기서 집필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는 다섯 편의 한문 단편이 들어 있는 금오신화를 석실에 감추고 “후세에 반드시 설잠(김시습의 호)을 아는 이가 있으리라.” 하며 칩거를 마치고 금오산을 떠났다.

그가 금오산 칩거 생활을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온 때는 37세 무렵이었다.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짓고 한양 나들이를 자주했다. 세조가 죽고 예종을 거쳐 성종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은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는 술에 취하는 날이 많았는데 술에 취하기만 하면

“우리 영묘(세종)를 뵙지 못하는구나.”

하면서 매우 비통한 심정으로 울음을 참지 못하였다고 한다. 조정대신들 중에는 길을 가다가 김시습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봉변을 당하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해동야언>에 소개된 일화를 보자.


어느 날 길을 가던 정창손이 김시습과 마주쳤다. 정창손은 사위 김질과 함께 단종복위계획을 밀고한 장본인이었다.

“이놈, 창손아! 종노릇이 편하냐? 네 놈도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

정창손은 화가 났으나 더 창피를 당할까봐 못 들은 척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또 한 번은 옛 벗인 신숙주가 사람을 시켜 김시습을 대취하게 한 후에 집으로 데려오라고 하여 좋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비단이불을 덮어 재웠다. 술에서 깨어난 그는 옷을 벗어던지고 신숙주를 향하여 독설을 퍼붓기를

“좋은 옷과 신발은 백성의 가죽이요, 맛있는 음식은 백성의 살과 피라는 사실을 알기나 하느냐?” 하였다고 한다.
<해동야언 권2>에서 인용


43세에 이르던 해에 조상의 제사를 지내면서 김시습은 크게 깨우침을 얻었다. 이제껏 방랑하다가 가정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대를 잇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가장 큰 불효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환속하여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다시 가정을 이루며 살았다. 주위에서 벼슬에 나가기를 권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아내가 죽으니 그는 다시 중이 되어 전국을 방랑했다.


늙고 지친 몸을 이끌고 설악산 오세암에 잠시 의지하면서 약초와 나물로 연명하다가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 몸을 의탁하다가 59세에 숨을 거두었다.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매장해 두어라.”

그의 유언대로 무량사 중들이 절 옆에 매장했다가 3년이 지난 뒤 관을 열어보았는데 안색이 생시와 다름이 없었다. 중들이 모두 놀라 성불했다면서 화장 후에 나온 사리를 무량사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부도가 훼손되자 사리를 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가 불교계의 요청으로 2017년에 원래 있던 무량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현재 무량사의 김시습 부도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율곡 이이는 <율곡전서>에서 김시습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외모는 못생기고 키는 작았으나 재질이 영특하였으며 대범하고 솔직하였다. 또한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세에 분개한 나머지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하였고,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방랑하며 살았다.

<율곡전서> 제14권 잡저 편

*** 다음 이야기는 < 경혜공주 부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다 > 편이 이어집니다.

정원찬 작가

▶장편소설 「먹빛」 상·하권 출간
▶장편소설 「공주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출간
▶뮤지컬 「명예」 극본 및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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