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들 앞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읽은 연산군은 이젠 조의제문의 문구를 하나씩 해석한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2번째 기사)

“ ‘조룡(祖龍)이 포학을 자행하였다’는 글귀의 조룡은 진시황(秦始皇)인데, 종직이 진시황을 세조에 비유한 것이요, (其曰: ‘祖龍之弄牙角’ 者, 祖龍秦始皇也, 宗直以始皇比世廟)

‘왕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구절의 왕은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을 치고 손자 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김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 단종) 에 비유한 것이다.

(其曰: ‘求得王而從民望’ 者, 王, 楚懷王 孫心, 初項梁誅秦, 求孫心以爲義帝, 宗直以義帝比魯山。)

또한 ‘양흔낭탐(羊狠狼貪 항우를 말함)이 관군(冠軍 송의를 말함)을 마음대로 죽였다.’고 한 것은, 김종직이 양흔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마음대로 죽였다 함은 세조가 김종서를 주살한데 비유한 것이다. (其曰: ‘羊狠狼貪, 擅夷冠軍者’ 宗直以羊狠狼貪指世廟, 擅夷冠軍, 指世廟誅金宗瑞)

연산군은 김종직이 양흔낭탐(羊拫狼貪)한 항우를 세조에, 항우에게 죽은 관군 송의는 김종서를 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보니 연산군은 세조를 진시황과 항우, 두 인물로 비유하고 있다.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 정벌하는 도끼)에 기름칠 아니했느냐.’고 한 것은, 김종직이 노산(단종을 말함)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其曰: ‘胡不收而膏齊斧?’ 者, 宗直指魯山胡不收世廟。)

그 ‘끝내 배신당하여 해석(醢腊 젓과 포. 시해당함을 비유함)가 되었다.’는 것은, 김종직이 노산(단종)이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느냐 하는 것이요.

(其曰: ‘爲醢腊於反噬。’ 者, 宗直謂魯山不收世廟, 反爲世廟醢腊)

그 ‘자양(紫陽)은 노련한 필법(老筆)을 따름이여, 떨리는 마음을 공손히 가라 앉히며.循紫陽之老筆兮, 思螴蜳以欽欽。 ’라고 한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賦)를 짓는 것을, 《강목(綱目)》의 필(筆)에 비의한 것이다.

其曰: ‘循紫陽之老筆, 思螴蜳以欽欽。’ 者, 宗直以朱子自處, 其心作此賦, 以擬《綱目》之筆。

그런데 김일손이 그 문(文)에 찬(贊)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였다. (馹孫贊其文曰: ‘以寓忠憤’)

연산군의 말은 이어진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는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난(亂)을 꾀함으로 화기(禍機)가 거의 일어나려는 찰나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앰으로써 종묘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져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종직이 자기 문도(門徒)와 더불어 성덕(聖德)을 기롱하고 논평하고 심지어 김일손으로 하여금 사서(史書)에다 속여 기록(誣書)하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생긴 일이겠는가. 속으로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내가 지금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동·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 관원들은 그 형명(刑名)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러자 참석한 신하들이 의견을 말하였다.

가장 먼저 정문형·한치례·이극균·이세좌·노공필·윤민·안호·홍자아·신부·이덕영·김우신·홍석보·노공유·정숙지가 의논드렸다.

"지금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오니,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사옵니다. 종직이 세조 조에 벼슬을 오래하자, 스스로 재주가 한 세상에 뛰어났는데 세조에게 받아들임을 보지 못한다 하여, 마침내 울분과 원망의 뜻을 품고 말을 글에다 의탁하여 성덕(聖德)을 기롱했는데 그 말이 극히 부도(不道)합니다. 그 심리를 미루어 보면 병자년(1456년 세조 2년의 사육신 사건, 필자 주)에 난역(亂逆)을 꾀한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리까. 마땅히 대역(大逆)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해서 그 죄를 명정(明正)하여 신민의 분을 씻는 것이 실로 사체에 합당하옵니다."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라는 의견이다. 그런데 정문형 등의 의견 중에 김종직이 세조를 원망하여 조의제문을 지었다는 말은 시기가 안 맞는 거짓말이다. 김종직은 1457년에 조의제문을 지었고, 1459년에 과거에 급제했다.

예림서원 (경남 밀양시) (사진=김세곤)
예림서원 (경남 밀양시) (사진=김세곤)
예림서원 안내판 (사진=김세곤)
예림서원 안내판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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