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무오사화) - 110회 조의제문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의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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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무오사화) - 110회 조의제문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의견 (2)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0.10.05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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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앞에서 여러 대신들이 의견을 말한 뒤에 이인형·표연말이 의견을 말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지칭한 뜻을 살펴보니 죄가 베어도 마땅하옵니다."

김종직의 문인들 조차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인형(1436∼?)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1495년 12월 3일에 대사간이 되었고, 1496년 3월에는 동부승지를 하였고, 1497년 8월 29일부터 전라도 관찰사를 하다가 1498년 6월21일에 전라도관찰사에서 체임되었다. 특히 이인형은 전주에서 김종직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김종직의 문인인 표연말(1449∼1498)은 동문인 김굉필·정여창 등과 함께 문장에 뛰어났고, 조위·김일손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그는 1472년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고, 1490년에는 이조참의·대사성이 되고, 1492년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그 뒤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497년에는 대사간 1498년에는 겸 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였다.

그런데 김종직의 제자인 표연말은 다음 날인 7월18일에 김종직 행장을 지었다 하여 국문을 당한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8일 3번 째기사)

7월 18일의 ‘연산군일기’를 읽어 보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이원(李黿)이 김종직의 시호를 의론하면서 아름다움을 칭찬한 것이 공자(孔子)와 같았으며, 표연말이 김종직의 행장(行狀)을 지었으니, 청컨대 아울러 국문하옵소서."

이러자 연산군은 ‘가하다.’고 전교하였다.

이원은 공초하였다.

"신은 일찍이 김종직에게 수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직이 동지성균(同知成均)으로 있을 적에 신이 생원(生員)으로 성균관에 거접하면서 목은(牧隱)의 관어대부(觀魚臺賦)를 차운하여 종직의 과차(科次)로 나아가니, 종직이 칭찬을 하였습니다. 김일손이 신더러 그 제자라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오며, 그 문집도 신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고, 이른바 ‘육군(六君)’이란 것도 역시 알지 못하옵니다.

신이 봉상 참봉(奉常參奉)이 되어 종직의 시호를 의론하기를 ‘종직은 천자(天資)가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온량(溫良)하고 자애(慈愛)하였고, 일찍이 시례(詩禮)를 배워 자신이 이 도를 책임하여 덕에 의거하고 인(仁)에 의지하고, 충신하고 독경(篤敬)하여 사람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자기 직책을 삼았다. 그 학문을 하는 데는 왕도를 귀히 여기고 패도를 천히 여겼고, 그 일에 임해서는 지극히 간략하여 번거함을 제거하였고, 그 사람을 가르침은 문(文)을 널리 배워 예로 간략하고, 어버이를 섬기면 그 효를 다하고 임금을 섬기면 그 충을 다했으며, 사람의 선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악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청(淸)해도 애(隘)하지 않고 화(和)해도 흐르지 않았으며, 문장과 도덕이 세상에 특출하였으니, 참으로 삼대(三代) 시대의 유재(遺才)인 동시에 사문(斯文)에 대한 공이 중하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본시 종직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표연말이 지은 행장(行狀)에 극구 칭찬하였기 때문에 이에 인하여 이렇게 의론한 것이온데, 그때에 신이 과찬을 한 것으로써 죄를 받았습니다."

이어서 표연말이 공초하였다.

"신은 함양(咸陽)에 사옵는데,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와서 신이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이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경의(經義)에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였으며, 그 문집은 신이 보았으나 단 조의제문은 글의 뜻을 해득하지 못했으며, 그 시집(詩集)은 당시에 보지 못했으므로 이른바 ‘육군(六君)’이 어느 사람을 지적한 것인지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신이 김종직의 행장을 지으면서 쓰기를 ‘공의 도덕과 문장은 진실로 일찍이 현관(顯官)으로 등용되어 사업에 베풀었어야 할 것인데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外職)을 빌어 오래 하리(下吏)에 머물러 있었고, 늦게야 임금의 알아줌을 입어 빨리 육경(六卿)으로 승진되어 바야흐로 크게 쓰이게 되었는데, 공의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두 번 다시 조정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우리 도의 불행이 아니랴! 의논하는 자는, 「공이 조정에 선 지 오래지 않아서 비록 큰 의논을 세우지 못하고 큰 정책을 진술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세상의 사문(斯文)의 중망을 짊어지고 능히 사도(師道)로서 자처하여 인재를 작성함에 있어서는 근세에 한 사람일 따름이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표연말은 「조의제문」을 보았지만 글의 뜻을 해득(解得)하지 못하였다. 이는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만큼 「조의제문」은 속뜻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함양군 역사인물공원 (사진=김세곤)
함양군 역사인물공원 (사진=김세곤)
역사인물공원기 (사진=김세곤)
역사인물공원기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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