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차문화는 한족의 문화라기보다 알타이족의 문화

보이숙차/보이생차/하관차창의 타차/선흥자사호
보이숙차/보이생차/하관차창의 타차/선흥자사호

[한국농어촌방송/경남=김민석 박사] 만주의 역사를 기록한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1115년에 건국하고 1234년에 멸망한 암바 아이신 구룬(Amba Aisin Gurun 大金國)의 시조 함보는 신라 출신이며, 신라의 왕성인 金을 국호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뿐만아니라 금나라의 후손임을 자처하여 1616년 후금을 세운 청태조 누루하치 이후 1912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며 만주국을 세운 선통제(宣統帝) 푸이까지 청나라 황제의 성이 바로 아이신줴뤄(愛新覺羅)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이신(Aisin 愛新)이라는 단어인데 Aisin은 金의 만주어 발음이다. 뿐만아니라 청 황제의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청나라 왕들은 자신이 알타이(金)와 신라의 후손임을 자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성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의 성(性)인 愛新覺羅는 ‘新을 사랑하고 羅에서 깨달아라’라는 뜻이다. 이 해석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보면, ‘신라를 사랑하고 깨달아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청나라 황제들이 신라의 후손임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가 병자호란의 처리과정에서 알 수 있다.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인조는 삼전도에서 숭덕제에게 삼배구고두레로 형제의 연을 맺었다. 청나라는 건국 초기 4가지 계급제도를 실시하였는데 가장 높은 계급을 후금시대에 공을 세워 청나라 건국에 도움을 준 인물을 형제로 칭하여 가장 높이 대우하였다. 그리고 가장 하급계층을 후금에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싸웠던 명나라 한족들로 그들에게는 철저히 군신관계를 요구하였다.

그런데 조선이 남한산성에서 결사항전으로 마지막까지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청 태종인 숭덕제 황타이지는 명과는 달리 조선에는 형제의 예를 갖추었고 회유책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기조는 청나라 통치기간 동안 그대로 유지되어 청나라는 한족을 피지배계층으로 분류하여 철저히 관리하였는데, 그 한 예가 한족만주금족령이다. 한족만주금족령은 한족에게 문화적으로 흡수당한 원나라의 실수를 재현하지 않기 위하여, 청나라가 한족을 통치한 전 기간 동안 한족 어느 누구라도 만주 땅을 밟으면 참수를 당하는 강력한 한족과의 분리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만주에 조선인은 자유로운 출입과 이주가 가능하게 하여, 청나라 말기에 우리 선조들이 일제의 핍박을 피하여 만주로 대거 이주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1. 중국의 차를 지킨 알타이족(金族)

지금의 중국의 차문화가 발전하게 된 데에는 알타이족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기원전 2세기 초에 한 고조 유방은 조공으로 묵돌선우에게 운남성의 차를 바쳤다. 그러다 기원전 2세기 말에는 알타이족과 한나라의 세력관계가 변함으로 조공이 아닌 차와 말의 교역형태가 만들어졌다. 결국 이러한 유방의 차와 목돌선우의 말의 교역이 차마고도가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기원전 1세기 초에 투후 김일제에 의해 산둥성을 중심으로 투국이 만들어지고 나중에는 신나라로 발전하여 한나라를 멸망시키는 서기 8년까지 100여 년간 황하를 중심으로 많은 차밭이 만들어졌다. 결국 신나라의 멸망과 그 중심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함으로 해서 허베이 허난, 쓰찬, 안후이, 퓨젠의 좋은 차들이 당·송시대 해양무역로를 통해 차를 필요로 하는 한반도의 왕족과 귀족들에게 판매되었다.

이렇게 알타이계 지배층들이 차를 좋아한 것과 다르게 한족 지배층은 차 농사의 어려움을 이유로 하여 그다지 차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특히 중국 역사상 대표적인 한족 나라이고 농민세력에 의해 세워진 명나라는 농민들의 차 농사의 어려움을 이유로 하여 차보다 술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만연하였다. 이러한 명나라의 차 배척문화는 사대주의와 성리유교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기간 동안 차보다는 술의 가까이하는 문화가 훨씬 번창했다.

그러다 다시 후금의 후손인 청나라 때에 이르러 다시 황제들과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차문화가 번성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만 보더라도 중국의 차문화는 한족의 문화라기보다는 알타이족들의 문화라고 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

2. 알타이족과 역사를 같이한 보이차

청나라 옹정제 10년에 황실 진상품인 공차(貢茶)로 선정되어 황제가 마시는 차로 널리 알려진 보이차의 탄생에는 5000km이상의 차마고도의 긴 여정과 관계가 있다. 차마고도는 묵돌선우에게 한 고조 유방이 차를 조공한 이후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아직까지 사용되는 한족과 알타이족의 공식적인 교역로이다.

보이차는 원래 쓰마오에서 만들어질 때는 녹차 형태의 산차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차마고도를 통해 티벳으로 운반되는 5000km이상의 여정에서 차가 부서지고 못쓰게 되는 문제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차의 훼손을 막고자 고안해 낸 방법이 긴압을 통한 병차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원래 보이차의 모차는 녹차이다. 이러한 녹차는 긴압의 과정을 거쳐 서로 부딪치어도 잘 부서지지 않는 딱딱한 형태의 병차가 만들어 진다. 그리고 운반의 편리성을 위하여 7장을 한 묶음으로 하는 7자 병차 형태의 생차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생차가 티벳으로 가는 과정에서 차색이 녹색의 녹차에서 후발효가 일어나 흑색의 흑차로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보이차도 청 몰락 이후 공산화와 문화혁명기를 거치며 그 명맥이 거의 끊어져 버렸다. 그러다 1970년대에 모택동과 닉슨의 핑퐁외교를 계기로 하여 보이차가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때 홍콩과 대만 및 전 세계 화교를 중심으로 보이차 수요가 폭발하였다. 그래서 숙성이 오래된 보이차가 모두 소진되자, 곤명차창에서 추병량, 노국영을 중심으로 숙차(熟茶)를 연구 개발하였다.

원래 보이차는 생차(生茶)로 발효 기간이 10년 이상 되어야 제대로 된 맛을 내는데 폭주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하여 빨리 먹을 수 있는 숙차(熟茶)를 곤명차창에서 연구 개발하여 맹해차창, 하관차창 등에서도 양산 체계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숙차를 프랑스로 수출하였는데 이후 프랑스에서 보이차의 효능이 논문을 통해 재발견되며 보이차의 명성은 더욱더 화려 졌다.

그러자 운남성은 정부 차원에서 보이차의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작은 마을인 푸얼(普洱)이 속해 있던 쓰마오(思茅市)를 아예 푸얼시(普洱市)로 개명해 버렸다. 예전에는 푸얼마을에서만 생산되던 보이차가 지금은 예전의 쓰마오인 푸얼시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차를 보이차란 이름으로 세상에 판매하고 있다.

1) 보이차 산지와 모양

원래 보이차는 서쌍판납(西雙版納) 및 란창강(瀾凔江) 부근에서 생산된 차이지만 차마고도 지역의 교역 거점 중 하나인 윈난성 푸얼현(普洱县)이라는 마을에서 주로 거래되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특히 산지로 이무산과 포랑산이 쌍벽을 이루는데 청나라 옹정제 때 황실 공납으로 지정되었다는 보이차가 바로 이무산 보이차다. 다른 지역에 비해 화려한 향을 자랑한다.

유독 이무산 배방에서는 긴압시 줄기를 많이 섞는데, 시원한 맛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무산이 여성스럽고 화려한 맛이라면, 포랑산은 무척 쓰고 기운이 강하다. 쓴맛 뒤에 단맛이 특징이며 특히 포랑산의 마을 중 노반장(老班章) 지역이 가장 유명하다.

그리고 보이차는 원래에 대엽종의 찻잎 모양이 그대로 살아있는 산차(散茶)로 만들어 졌어나, 나중에 보관과 운반을 편리하게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의 긴압차로 만들어졌다.

이후에 보이차는 둥근 떡 모양의 칠자병차(七子餠茶) 이외에도, 늙은 호박 모양의 금과공차(金瓜貢茶), 벽돌 모양의 전차(塼茶), 정사각형의 방차(方茶), 만두나 송이 모양의 타차(沱茶), 하트 모양의 긴차, 탁구공 모양의 주차, 사람 머리 크기와 같이 크게 만든 인두차 등의 종류가 있다. 그리고 기둥모양의 천량차(千量茶)와 죽통향차(竹筒香茶) 등이 있다.

2) 보이 생차(生茶)와 숙차(熟茶)

보이생차는 모차를 긴압하여 만들어 완성하는 것이다. 생차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찻잎속의 폴리페놀 옥시다젠이라는 산화효소성분에 의하여 자연발효가 진행된다. 생차는 처음에는 차의 쓴맛과 떫은맛이 나며, 차탕의 색도 노랑계열의 색이었다. 발효가 진행됨에 따라, 쓴맛과 떫은맛이 차츰 약해지면서 맛도 깊은 맛이 나오게 된다. 차색도 황색에서 주황색으로 마지막엔 홍색으로 차츰 붉은 계열의 색을 띠게 된다.

보이생차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가 할아버지 때 만들고 손자 때 마신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말은 보이생차의 숙성기간이 길수록 맛이 깊다하여 붙여진 이야기이다. 숙차는 모차를 악퇴 발효라는 인위적인 발효공정을 한 번 더 하여 긴압하여 차를 완성하는 것이다. 숙차는 1973년에 중국정부의 노력으로 개발한 공법으로, 악퇴 발효라는 공정 시 미생물에 의하여 발효를 인위적으로 하게 하여, 차의 기본적인 쓴맛과 떫은맛을 감소하여 부드럽고 단맛을 내며, 차색도 붉은색으로 변화하게 만들었다.

3) 보이차의 효능

보이차의 대표적 효능은 체내의 기름기 제거 효과가 있어 고지혈이나 동맥경화에 좋고 소화촉진 효과가 뛰어나다.

(1) 체내의 기름기 제거 효과

체내 지방 분해 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기름진 음식에 곁들여 마시면 체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지방 분해 성분이 많다는 이유로 체중 감량에 효과를 보았다는 사람도 많다. 기름기가 많은 음식에 잘 어울리며 곰팡이균을 번식시켜 만들기 때문에 특유의 냄새가 있다. 나아가 고지혈증이나 동맥경화를 완화시키거나,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준다는 등 등 지방에 관련된 질환 및 고혈압 완화나 항암작용 등, 건강에 유익한 효능이 많이 발표되고 있다.

(2) 소화 촉진 효과

특히 보이차를 한잔만 마셔도 바로 답답했던 속이 쑥 내려갈 정도로 강한 소화촉진 효과가 있다. 알칼리도가 높고 속을 편하게 해주며 숙취제거와 소화를 도와주는 작용을 한다.

김민석 박사

▶경영학 박사

▶오성다도명가연 대표

▶경남협동조합협의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문화창업진흥원 원장

▶2020 강진야생차축제 찻자리 부문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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