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시대를 읽다. (2) - 민씨 척족의 세 도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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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시대를 읽다. (2) - 민씨 척족의 세 도둑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0.12.1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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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서울에 화적떼가 크게 일어나, 대궐로 진상되는 임금의 물건까지 도난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러자 고종은 좌우 포도대장 한규설과 이종건을 파직시키고, 신정희를 좌포도대장에 임명하였다. 이러자 한 달 사이에 도둑들이 겁을 먹고 조용해졌다.

하지만 신정희는 중전의 비호를 받고 있는 무당 진령군만은 잡아다가 처벌하지 못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안타깝다! 신정희는 명종 때 변협이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았던 승려 보우를 처단한 일을 떠올리며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이 무렵에 백성들은 여흥민씨(驪興閔氏)들 가운데 ‘세 도둑’을 입에 오르내렸다. 즉 서울의 도둑 민영주, 강원도 민두호, 그리고 경상도 민형식(閔炯植)이었다.

민두호는 정권 실세 민영준(1901년에 민영휘로 개명)의 아비이고, 민영주는 민영준과 종형지간이며, 민형식은 민영위의 서자였다.

민영주(1846∽미상)는 유생 시절부터 서울의 부자들과 서울 근교의 주요 나루인 한강 · 서강 · 마포나루 등의 거상(巨商)의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는 법을 무시하면서 사람들의 주리를 틀고 거꾸로 매다는 등 온갖 악형을 가해 날마다 돈을 긁어모았으며, 일상생활은 거의 임금수준의 호사생활이었다. 민영주는 1892년 12월에 이조참의를 지냈고 1893년 5월에는 성균관 대사성을 했는데, 흉악하기가 이전과 같아서 사람들은 그를 ‘민 망나니’라고 불렀다. 망나니는 칼춤을 추는 사형 집행수의 속된 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악하고 천한 이를 표현하는 말이다.

민두호는 1887년부터 춘천부사를 했는데, 춘천을 유수(留守)로 승격하여 임금이 머물 숙소인 행궁을 짓자, 실세 민영준이 아비 민두호를 그대로 유수 자리에 앉혔다. 그리하여 민두호는 1892년부터 1893년 5월까지 춘천부 유수로 근무하다가 잠시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를 하였다, 그는 다시 1893년 12월부터 춘천부 유수를 하였다.

그런데 민두호는 어리석고 천박할 뿐만 아니라 흉악하고 욕심이 끝이 없었다. 민두호가 유수로 부임한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강원도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 뿔뿔이 흩어지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백성들은 민두호를 ‘민 쇠갈고리’라 불렀다.

민형식은 1891년 12월에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는데 나이 33세였다. 그는 통제사로 부임한 1년 사이에 삼도의 부자들을 무조건 잡아 가두고 재산을 갈취했다. 오죽했으면 백성들이 그를 ‘악귀(惡鬼) 또는 미친 호랑이(狂虎)’라고 불렀을까? 이런 말들은 그가 사람을 산 채로 씹어 먹을 정도로 포악하다는 뜻이었다. 특히 민형식은 당시 국가 세입 480만 냥의 15%에 해당하는 70만 냥을 치부했으니 세 도둑 중에 가장 큰 도둑이었다.

이 당시에 중전 민씨의 비호를 받은 민씨 척족들은 하나같이 탐학하였다. 팔도의 큰 고을은 대체로 민씨 척족들이 수령을 차지하였으며, 평안 감사나 통제사는 10여 년 넘게 여흥민씨가 아니면 차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 팔도에는 민씨 척족을 원망하는 소리로 뒤덮였고 아이들 노래나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온통 ‘ 난리가 왜 일어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1894년 6월 하순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의 친일정권과 대원군이 전면에 나서자, 서울의 도둑놈 민영주는 양주로, 춘천 유수 민두호는 진령군과 함께 충주로 도망갔다. 오직 도망가지 않은 자는 민영환과 민영소였다. (역주 매천야록 상, p 371-372)

1895년 3월 18일에 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무대신(法務大臣) 서광범은 민영주를 처단하도록 아뢰니 고종이 윤허하였다.

"동지중추원사 민영주는 본래 무뢰배로서 불량배와 결탁하여 경성(京城)과 지방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은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죄악이 오래 쌓이고 원한이 세상에 넘쳐나니, 이는 나라의 횡포를 부리는 원흉입니다. 법으로 보아 용서할 수 없으니,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잡아다 가두고 징계하여 처단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1895년 4월 러시아의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힘이 강함을 안 고종과 중전은 친일파를 멀리하고 민씨 척족들에 대한 대사면을 단행했다. 즉 7월 3일에 민영준, 민영주, 민형식, 조병갑, 민응식 외 260명을 사면한 것이다.

덕수궁 함녕전 (고종이 거처한 곳) (사진=김세곤)
덕수궁 함녕전 (고종이 거처한 곳)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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