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시대를 읽다 (5) - 을미사변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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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시대를 읽다 (5) - 을미사변이 일어나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0.12.2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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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에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민왕후(1851~1895, 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가 경복궁 곤녕합에서 시해된 것이다. 이는 세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참극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사건의 배후와 시해 과정 그리고 시해범 등의 논란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을미사변은 은밀히 진행된데다가 사건 직후, 일본 측이 철저히 인멸, 왜곡했기 때문이다.

고종실록이 일제 강점기인 1935년에 간행되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을미사변의 진상을 고종실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먼저 1895년 8월 20일의 고종실록이다.

“묘시(卯時 아침 5-7시)에 왕후가 곤녕합(坤寧閤)에서 붕서(崩逝)하였다. 【이보다 앞서 훈련대(訓鍊隊) 병졸(兵卒)과 순검(巡檢)이 서로 충돌하여 양편에 다 사상자가 있었다. 19일 군부 대신 안경수가 훈련대를 해산하자는 의사를 밀지(密旨)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가서 알렸으며,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도 같은 날 일본 공사를 가서 만나보고 알렸다.

이날 날이 샐 무렵에 전(前) 협판(協辦) 이주회가 일본 사람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와 함께 공덕리(孔德里)에 가서 대원군을 호위해 가지고 대궐로 들어오는데 훈련대 병사들이 대궐문으로 마구 달려들고 일본 병사도 따라 들어와 갑자기 변이 터졌다.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은 광화문 밖에서 살해당하고 궁내 대신 이경직은 전각(殿閣) 뜰에서 해를 당했다. 난동은 점점 더 심상치 않게 되어 드디어 왕후가 거처하던 곳을 잃게 되었는데, 이날 이때 피살된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기 때문에 즉시 반포하지 못하였다.】

민왕후가 시해당한 후 2개월 정도 지난 10월 15일에 고종은 왕후의 승하를 공식화했다.

"지난번 변란 때에 왕후의 소재(所在)를 알지 못하였으나 날이 점차 오래되니 그 날에 세상을 떠난 증거가 정확하였다. 개국(開國) 504년 8월 20일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에서 승하(昇遐)하였음을 반포하라." (고종실록 1895년 10월 15일)

그러면 민황후 시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8월 19일 새벽 2시에 조정은 전격적으로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키고 있는 훈련대 해산을 발표했다. 이날 오전 7시 군부 대신 안경수가 훈련대를 해산한다는 밀지(密旨)를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가서 알렸다.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도 같은 날 일본 공사를 만나 알렸다. 이후 우범선은 훈련대 800여명과 함께 동참한다. (한편 1919년 3월 4일의 ‘순종실록 부록’의 고종 황제 행장에는 ‘을미년(1895) 8월. 적신(賊臣) 우범선 등이 변을 일으켜 중궁전이 승하(昇遐)하였다.’고 적혀 있다.)

8월 19일 밤 궁궐에서는 사면된 민영준이 궁내부 대신에 내정된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밤늦도록 열렸다. 왕후는 고종과 함께 달 놀이까지 즐겼다 한다.

8월 20일 새벽 1시경 일본 사람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통역담당 스즈키 등 30명은 공덕리에 가서 3시경에야 강제로 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출발했다. 그런데 고종실록에는 이주회가 오카모토와 동행했다고 적혀 있지만 이는 거짓말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연 지음, 기쿠지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 2015, p 44)

대원군 일행은 4시 반 경에 서대문에 이르렀고, 5시 반에 광화문에 도착했다. 이때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은 광화문 밖에서 살해당했다. 광화문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각각 100여 명의 일본군이 추성문, 춘생문을 통과하여 궁궐을 공격했다. 이에 궁궐수비대 미국인 교관 다이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하에 300-400명의 시위대가 저항하였으나 곧 무너졌다. 다이와 사바틴은 서양인 숙소로 몸을 숨겼고, 궁궐수비대는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 날을 목격한 러시아인 사바틴 보고서는 김영수의 저서 ‘명성황후 최후의 날’에 나와있다.)

이후 일본군 수비대 600여 명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낭인 수 십명과 군인들은 곧바로 건청궁으로 돌진하여 왕과 세자의 측근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인 곤녕합으로 향하였다. 이 때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왕후를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는데 이것이 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단서가 되었다.

민왕후는 옥호루에서 낭인들에게 비참하게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 낭인들은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살해하였다. 이내 왕후와 궁녀 몇 명의 시신은 녹원에서 불태워졌는데 6시 10분이었다.

경복궁 건천궁 현판 (사진=김세곤)
경복궁 건천궁 현판 (사진=김세곤)
곤녕합 (사진=김세곤)
옥호루 (玉壺樓) (사진=김세곤)
곤녕합(사진=김세곤)
곤령각(坤寧閣)(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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