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시대를 읽다. (9) -고종 민왕후를 폐서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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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시대를 읽다. (9) -고종 민왕후를 폐서인하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1.0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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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틀 후인 8월 22일에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민왕후를 폐서인하였다.

"짐(朕)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32년에 다스림과 덕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왕후 민씨(閔氏)가 그 친당을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하고 짐의 총명을 가리어 백성을 수탈하고 짐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아먹고 탐학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

짐이 그 죄악이 극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벌하지 못한 것은 짐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역시 그 패거리를 꺼려 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짐이 이것을 억누르기 위하여 지난해 12월에 종묘(宗廟)에 맹세하기를, ‘후빈(后嬪)과 종척(宗戚)이 나라 정사에 간섭함을 허락하지 않는다.’(홍범 14조의 제3조- 필자 주 )하여 민씨가 뉘우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민씨는 구악(舊惡)을 고치지 않고 그 패거리와 보잘것없는 무리를 몰래 끌어들여 짐의 동정을 살피고 국무 대신(國務大臣)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며, 또한 짐의 나라의 군사를 해산한다고 짐의 명령을 위조하여 변란을 격발시켰다.(훈련대 해산을 의미함- 필자 주)

사변이 터지자 짐을 떠나고 그 몸을 피하여 임오군란(1882년)의 지나간 일을 답습하였으며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왕후의 작위와 덕에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이 차고 넘쳐 선왕(先王)들의 종묘를 받들 수 없는 것이다. 짐이 부득이 왕실의 옛법을 삼가 본받아 왕후 민씨를 폐(廢)하여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고종실록 1895년 8월 22일)

그런데 고종은 폐서인 서명을 거절했다. 서명을 강요한다면 자신의 손을 자르겠다고 말했다. (비숍 저·신복룡 옮김,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p 288)

하지만 친일파 궁내부 대신 이재면과 총리대신 김홍집 그리고 외부대신 김윤식, 농상공부 대신 서리 정병하, 군부대신 조희연, 법부대신 겸 학부대신 서광범이 서명하여 조령을 공포했다. 이때 탁지부 대신 심상훈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갔으며 내부대신 박정양은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외부대신은 민왕후의 폐서인 사실을 각국 공사관에 알렸다. 이러자 베베르 러시아 공사, 알렌 미국 공사를 비롯한 몇몇 외교관들이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고종을 알현하였다. 이때 고종은 몹시 창백해 있었다.

한편 민왕후가 주도한 민씨척족들이 권력을 잡고 매관매직으로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만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도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탐학에서 발단되었고, 장호원으로 피난 간 민왕후는 청나라를 끌어들였다. 더욱이나 1894년 동학 농민전쟁 때 고종 부부의 뜻에 따라 병조판서 민영준이 청나라 군대 파병을 요청하여 청일전쟁을 자초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이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왕비는 20년 동안 정치를 간섭하면서 나라를 망치게 하여 천고에 없는 을묘왜변을 당했다면서, 이때 미우라는 자신이 이미 큰 죄악을 저질렀으므로 여러 나라들이 이것을 구실삼아 자신의 죄를 성토할까 싶어, 고종을 협박하여 폐서인 조서를 내리게 하고 또 유언비어를 조성하여 민왕후가 난을 피하여 밖에 있다고 하므로 민간에서는 왕비가 임오군란 때처럼 충주에 있다는 소문이 전해졌으며, 어떤 사람들은 진주의 옥천암에 있다고도 하였다.

이 폐서인 조서가 비록 고종의 의견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실상(實相)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영국 지리학자 비숍 여사는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제36장 1896년 서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때때로 비양심적인 왕비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일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자신의 신변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왕은 그의 왕조의 가장 최악의 전통으로 되돌아갔다.”(비숍 지음 ·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p 443)

비숍의 ‘비양심적인 왕비의 간섭’이란 평가는 되새겨 봄직하다.

한편 민왕후가 폐서인(廢庶人)된 다음 날인 8월 23일에 왕태자가 상소문을 올렸다. 이러자 고종은 폐서인 민씨에게 빈(嬪)의 칭호를 특사(特賜)하였다.

그런데 1896년 2월 11일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김홍집, 정병하 등을 역적으로 몰아 처형하고 지난 8월 22일에 내린 조령이 역적 무리들이 위조한 것이라 하여 취소하였다.

경복궁 영추문 (사진=김세곤)
경복궁 영추문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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