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일 만인 8월 25일에 엄상궁(1854∽1911)을 입궁시켰다. 먼저 황현(1855-1910) 『매천야록』부터 읽어보자,

“전(前) 상궁 엄씨를 불러 입궁토록 했다. 민왕후가 생존해 있을 때는 고종이 두려워하여 감히 그녀와 만나지 못하였다. 10년 전 고종은 우연히 엄씨와 정(情)을 통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민왕후가 크게 노하여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고종의 간곡한 만류로 목숨을 부지하여 밖으로 쫓아 냈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그녀를 불러들였는데 변란이 있은 지 불과 5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고종이 이같이 쓸개 빠진 짓을 하여 도성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국역 『매천야록』 제2권 (1895년) ③, 11. 상궁 엄씨의 입궁)

엄상궁은 5세 때 입궁하여 민왕후를 모시던 중 고종의 승은을 입은 것이 발각되어 민왕후에 의해 쫓겨났다가 을미사변으로 입궁하였다.

황현은 고종의 엄비의 입궁에 대하여 혹평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고종은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싸였고,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곧이어 고종은 왕비간택령을 내려 정화당 김씨(貞和堂 金氏)를 왕비로 결정하였지만 ‘춘생문(春生門) 사건’으로 새 왕비의 입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왕비자리는 계속 비게 되었고, 엄 상궁이 고종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이후 엄상궁은 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시킨, 즉 아관파천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엄상궁은 권력을 휘둘렀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가 1897년에 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책의 ‘제36장 1896년의 서울’에는 엄 상궁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권력은 국왕을 둘러싸고 왕의 위엄과 탐욕을 등에 업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으며, 아관파천에서 공을 세운 엄상궁의 뜻대로 행사되었다. 왕의 총신들과 아첨꾼들은 그들의 친척들에게 벼슬을 주면서도 국왕의 우유부단함을 이용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비숍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2015, p 443-445)

이는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온 엄비 평가와 비슷하다.

“엄씨는 얼굴이 민왕후와 닮았고 권모와 지략도 그녀와 같았으므로 입궁한 후 크게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국정에 간섭하고 뇌물을 좋아하여 민왕후가 있을 때와 동일하였다. (위 책, 1895년 ③, 11. 상궁 엄씨의 입궁)

한편 엄상궁은 나이 43세인 1897년 10월 20일에 영친왕 이은을 낳았다. 고종은 45세였다.

이날의 고종실록이다.

“조령(詔令)을 내렸다.

‘궁인(宮人) 엄씨(嚴氏)가 오늘 해시(亥時)에 아들을 낳았으니 산모를 돌봐주는 등의 절차는 전례대로 거행하라.’

『매천야록』에도 이은의 출생이 적혀 있다.

“황제의 3남 이은이 출생했다. 상궁 엄씨를 귀인에 봉했는데 아이를 낳을 때에 산기가 전혀 없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서야 태어난 줄을 알았다. 고종은 이 아기를 매우 사랑하여 항상 무릎에 앉혀 놓고 똥오줌을 닦아 주며 좋아하였다.”

대한제국 선포와 때를 같이 하여 영친왕 이은이 탄생했으니 고종이 좋아할 만도 하다. 이후 엄상궁은 귀인(貴人)에 책봉되었고, 1903년에는 황귀비(皇貴妃)가 되었다.

한편 1885년부터 1897년까지 12년간 러시아 공사로 재직하면서 1896년의 아관파천을 주도한 러시아 외교관 웨베르가 1903년에 대한제국을 방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방문 소감을 남겼다.

“서울에 5년 만에 다시 와 보니 거리의 남루한 복장이 이전보다 두 배나 많았다. ... 고종 황제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엄비를 따라 미신을 신봉하고 있었다. 황제는 아주 호감을 주는 인물이지만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중략)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다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국인은 러시아, 일본 기타 열강의 국제관계 및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나라가 아떤 처지에 놓였는지 제대로 몰랐다. ... 관직은 강대국과 종속관계에 놓여 독립심이 박약하고 의타심이 강하다. 관직은 공적과 능력에 따라 임용되지 않고 뇌물의 액수에 따라 결정됐다. (후략)” (강준만 지음, 한국 근대사 산책 4, 인물과 사상사, 2007, p 19)

명성황후가 살아있을 때 고종은 무당 진령군을 좋아했는데 그 버릇은 대한제국이 탄생하여도 여전하다. 정말 버릇은 고치기 어렵나 보다.

경복궁 건천궁 (사진=김세곤)
경복궁 건천궁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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