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톺아보기 (6) - 서재필, 미국으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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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톺아보기 (6) - 서재필, 미국으로 돌아가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3.01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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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5월 14일에 34세의 서재필(1864∽1951)이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5년 12월 26일에 귀국한 지 2년 5개월 만이었다.

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7월 2일에 독립협회가 창립될 때까지는 정부에 대하여 매우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이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고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고발하였다.

1896년 9월 17일 자 독립신문 첫머리 논설에는 내부대신이 새로 임명된 거창군수 김봉수를 만나 “어떻게 자네가 고을 원님이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돈 3만 냥을 주고 고을 원님 벼슬을 샀다”고 대답했다가 파면되었다는 거짓말 같은 참말이 실려 있다.

재판소도 문제가 많았다. 재판소가 억울한 일 당한 사람을 법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소송하러 온 사람을 건방지다고 잡아 가두기까지 했다. (서재필 기념회, 선각자 서재필, 2014, p 93)

1894년 1월부터 1897년 3월 사이에 조선을 네 차례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1831∽1904)는 1897년 11월에 영국에서 발간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이렇게 적었다.

“아관파천 이후에도 구시대의 악습이 매일 벌어지고 대신과 다른 총신들은 뻔뻔스럽게 관직을 팔았다

부정한 매관매직이 더 심해지고, 예산을 장악한 사람이 내장원경이 되고 며칠만 권력을 잡아도 당상관에 오를 뿐만 아니라 무일푼이었던 친척과 친구에게 일확천금을 안겨주고, 사소한 비판만 하여도 관직을 잃은 것이 관례가 되어 행정은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

여러 가지 개혁에도 불구하고 조선에는 착취하는 사람들과 착취당하는 사람들, 이렇게 두 계층만이 존재한다.

전자는 허가받은 흡혈귀라 할 수 있는 양반 계층으로 구성된 관리들이고, 후자는 전체 인구의 4/5를 차지 하고있는 하층민들이다.

하층민들의 존재 이유는 흡혈귀들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이다.

(비숍 지음, 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2019)

더구나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는 한국 정부와 미국공사 알렌에게 서재필의 추방을 요구했다.

마침내 1897년 12월 13일에 외부대신 조병식은 알렌 주한미국 공사와 담판한다. 그는 알렌에게 정부를 비난하는 서재필은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자 알렌은 서재필이 미국인임을 강조하고 중추원 고문 계약기간 10년 중 남은 기간의 급료와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지급하지 않고는 해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알렌의 일기’에 나온다.)

1898년 4월 25일에 서재필과 정부 사이의 교섭이 미국공사 알렌의 주선으로 타결되었다. 정부는 서재필이 출국하는 조건으로 서재필과 계약한 10년 기간 중 잔여기간 7년 10개월의 봉급(28,200원)과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600원) 총 28,800원 중 「독립신문」 창간 당시 서재필에게 지급하였던 3천 원과 집 구입비(1,400원) 총 4,400원을 공제한 24,400원을 지급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러자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재고용하라는 편지를 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4월 28일에 정부는 “서재필은 이미 해고되었으므로 체류 여부는 본인 의사에 달린 것”이라며 재고용을 거절했다.

4월 30일에 이승만 등은 숭례문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그리고 정부에 서재필의 재고용을, 서재필에게는 체류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5월 2일에 서재필은 정부가 재고용하기 전에는 체류할 수 없음을 만민공동회에 답신하였다.

5월 14일에 서재필은 부인 암스트롱과 맏딸을 데리고 용산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날 용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재필을 전송했고, 서재필은 고별연설을 했디.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얼굴은 눈물로 가득 찼다. 참석자들의 눈에도 “흐르는 눈물이 한강을 이루었다” ( 5월 19일 「독립신문」)

한편 서재필이 떠나자 「독립신문」 주필 겸 사장이 된 윤치호는 5월 14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5월 14일 (토요일) 바람 불고 맑음.

오전 10시에 서재필 박사를 배웅하기 위해 용산에 갔다. 30명이 넘는 독립협회 회원들이 참석했다. 다들 눈물을 흘렸다. 서재필 박사에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변화이다. 1884년, 서재필 박사는 각계각층의 증오와 저주를 받으며 조선을 떠났다. 그 뒤 박사를 개처럼 죽이는 조선인은 누구라도 왕국에서 가장 충실한 신하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서재필 박사는 서울을 떠난다. 부패한 지배 세력은 박사를 증오하지만, 국민들은 그와 함께 있다.”

이렇게 서재필은 떠났어도 독립협회 활동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주 독립, 민권 운동이 더욱 거셌다.

독립협회 창립총회 터 (서울시 세종로 1번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앞) (사진=김세곤)
독립협회 창립총회 터 (서울시 세종로 1번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앞)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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