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시의 셋째 단락을 살펴보자. 셋째 단락은 8구이다.

네 올빼미가 무슨 공이 있으랴 四梟者何功

하늘의 보답을 참으로 자상했도다 天報諒殷懃

온화하였던 안제와 공제는 婉婉安與恭

바로 이 유씨들의 임금이었는데 乃是劉氏君

푸른 하늘을 속을 수 있다고 여겨 蒼天謂可欺

높이 요순의 훈풍을 끌어댔으나 高把堯舜薰

선위를 받는게 끝내는 역적이였네 受禪卒反賊

사씨는 글을 교묘하게 꾸몄다네. 史氏巧其文

그러면 한 구절씩 살펴보자.

네 올빼미가 무슨 공이 있으랴 四梟者何功

하늘의 보답은 참으로 자상했도다 天報諒殷懃

올빼미는 어미 새를 잡아먹는다 하여 패륜과 불효의 상징이다. 올빼미는 흉조(凶鳥)로, 간신, 악인을 의미한다. 즉 올빼미는 떳떳하지 못하게 얻은 권세를 뜻한다. 여기서 네 마리 올빼미는 바로 앞에서 말한 왕돈(王敦)·소준(蘇峻)· 환온(桓溫)·환현(桓玄)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욕에 눈이 멀어 자신이 모시던 임금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네 올빼미의 말로는 패가망신(敗家亡身)이었다.

온화하였던 안제와 공제는 婉婉安與恭

바로 이 유씨들의 임금이었는데 乃是劉氏君

안제와 공제는 유유(劉裕)가 모시던 황제였다. 안제(재위 396-418)는 동진의 10대 황제 사마덕종이고 공제(재위 419-420)는 동진의 11대의 마지막 황제 사마덕문이다.

그런데 유유는 황제를 내쫓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공제는 단종에, 유유는 세조에 해당한다.

푸른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蒼天謂可欺

높이 요순의 훈풍을 끌어댔으나 高把堯舜薰

이 시구에는 주어가 없다. 문맥으로 미루어 보면, 그 시구의 주어는 유유(劉裕)이다. 유유는 자신의 악행을 숨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요순임금과 같이 백성들을 위해서 인의정치(仁義政治)를 행한다고 착각하였다. 그만큼 유유는 예의와 염치가 없다.

선위를 받는 게 끝내는 역적이였네. 受禪卒反賊

사씨는 글을 교묘하게 꾸몄다네. 史氏巧其文

역적 유유는 선위(禪位)의 형식을 빌려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사관(史官)이 역사를 교묘하게 기술하여 유유에게 정통성(正統性)을 부여했다. 한마디로 역사왜곡이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 간 단종이 자살했다고 되어 있다.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서 자살하자 예(禮)로써 장사 지냈다.” (세조실록 1457년 10월 21일)

그런데 단종의 죽음을 직필한 이는 무오사화의 희생자 김일손(1464∽1498)이었다. 그는 성종실록 사초(史草)에 ‘노산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기록했다.

1516년 11월 23일자 중종실록에도 노산군이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傳位)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군(君)으로 강등하여 봉하였다가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또한 현종실록 1669년 1월 5일 자에는 진실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노산군이 살해당한 후 아무도 시신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가 곧바로 가서 곡하고, 관곽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산군 묘가 바로 그 묘입니다.”

한편 ‘음애일기’에는 ‘노산군이 자진(自盡)했다는 것은 당시 여우같은 무리들이 권세에 아첨하느라고 지은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진실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다. 당시의 사람들은 말을 안 하지만 다 알았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 단종을 ‘살해’한 임금이라는 것을.

이화장(김일손이 살았던 집) (사진=김세곤)
이화장(김일손이 살았던 집) (사진=김세곤)
이화장 전경 (사진=김세곤)
이화장 전경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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