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연산군 4년) 7월 17일에 윤필상 등은 김종직(1431∽1492)이 지은 「도연명(365∽427)의 술주(述酒)시에 화답하다〔和陶淵明述酒〕」란 시에 관해 아뢰었다.

“김종직의 시는 조의제문보다 더 심한 점이 있어서 차마 말을 못하겠습니다.”

윤필상 등은 시권(詩卷)을 올린 뒤 서문의 뜻을 해석하였다.

"그 ‘이는 영릉(零陵)을 애도하는 시다.’라고 한 것은, 영릉을 노산(魯山)에 비한 것이요, 그 ‘유유의 찬시(纂弑)의 죄’라 함은 유유를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춘추》의 일필에 비교한다.’함은 맹자(孟子)가 ‘《춘추》가 지어지자 난신적자가 두려워했다.’ 말했으므로 《춘추》에 비한 것이요, 그 ‘창천을 속일 수 있다 생각하여 높이 요·순의 훈업을 읍한다.’ 함은, 유유의 수선(受禪 선양 받음)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옵니다."

영릉은 동진(東晉 317-420)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恭帝 재위 418년~420년)이다. 유유(劉裕 363~422, 재위 420∼422)는 자칭 황제가 된 환현(桓玄)을 토벌한 후 중앙에 진출하여 공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선양받았는데, 공제를 시해한 후에 송(宋 420~479)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중국 동진 말기부터 송나라 초기에 걸쳐 살았던 도연명은 유유가 공제를 선위의 형식으로 왕위를 빼앗고 시해한 일에 대하여 분개하여 은유적으로 술주(述酒) 시를 지었다.

이러자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으랴! 그 제자마저 모조리 추핵(推覈

죄인을 추궁하여 죄의 실상을 조사함)하는 것이 어떠한가?”

이에 노사신이 앞장서서 윤필상ㆍ한치형과 함께 아뢰었다.

“연루자는 마땅히 국문해야 할 것이오나 만약 제자라 해서 모조리 추핵한다면 소요를 이룰까 걱정이옵니다. 동한(東漢 후한)이 당인(黨人) 다스리기를 너무 심하게 하여 종말에 쇠란(衰亂)하였으니, 지금 만연(蔓延 널리 퍼지게 함)시킬 수 없습니다.”

동한은 후한(後漢, 25~220)의 다른 명칭이다. 후한은 전한(前漢)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나라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나라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이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 불렀다.

이윽고 연산군은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임희재가 말한 선인(善人)이란 자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고 국문하라.“고 전교하였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5번째 기사)

그러면 임희재가 말한 선인(善人)이란 자가 누구인가?

1898년 7월 14일에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잡아올 때는 그 집의 문서까지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이러자 의금부는 이목(李穆 1471∼1498)의 집을 수색하여 임희재(1472~1504)가 이목에게 준 편지를 발견했다. 임희재는 조선시대 간신의 대명사 임사홍의 둘째 아들로 김종직)의 문인으로 이목과도 교류가 있었다.

이 날 발견된 임희재의 편지 일부를 읽어보면 선인(善人)은 ‘정석견, 강혼, 강백진, 권오복, 김굉필’을 말한다.

“지금 물론(物論 논의나 평판)이 심히 극성스러워 착한 사람(善人)이 모두 가버리니, 누가 그대를 구원하겠는가? 부디 시(詩)를 짓지 말고 또 사람을 방문하지 마오. 지금 세상에 성명을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근일(近日)에 정석견이 동지성균에서 파직되었고, 강혼은 사직장을 올려 하동의 원님이 되었고, 강백진은 사직장을 올려 의령의 원님이 되었고, 권오복도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이며, 김굉필도 이미 사직장을 내고 시골로 떠났으니, 그 밖에도 많지만 다 들 수가 없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4일 기사)

선인을 모두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전교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선인(善人) 가운데도 정석견 같은 사람은 나이가 늙고 지위가 높아서 그 동류가 아니온데, 이 사람이 파직당해 갔다는 것을 듣고서 이른 것이옵니다."

연산군이 다시 전교하였다.

"알겠으나, 김종직의 문집을 간행한 것만은 그르다.“

다시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정석견을 어떻게 처치해야 타당하옵니까?“

연산군은 "지만(遲晩) 다짐을 받아 아뢰도록 하라."고 전교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5번째 기사)

지만은 죄인이 벌을 받을 때에 오래 속여서 잘못했다고 자복하는 반성문이다.

예림서원 (경남 밀양시) (사진=김세곤)
예림서원 (경남 밀양시) (사진=김세곤)
예림서원 안내판 (사진=김세곤)
예림서원 안내판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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