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톺아보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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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톺아보기 (13)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4.0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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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0월 12일에 독립협회는 고종 미수 암살사건인 김홍륙독다(커피)사건으로 촉발된 노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를 저지시켰다. 심순택, 신기선 등 친러 수구파 일곱 대신이 파면되었고, 의정부 찬정(贊政) 박정양이 의정부 의정 서리로, 민영환이 군부 대신으로 임용되었다. (고종실록 1898년 10월 12일 2번째 기사)

12일 저녁에 독립협회 회원들과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해산했다.

각국의 외교관들은 대한제국에서 민중운동에 의해 개혁 정부가 수립된 사실에 놀랐다.

주한미국공사 알렌은 ‘하나의 평화적 혁명(a Peaceful Revolution)’이 일어났다고 미국 국무부에 보고할 정도였다.

“이 도시는 지금 막 집중적 열광의 시기를 통과했음을 보고함. 하나의 평화적 혁명이 일어남. 군중들의 요구에 의하여 거의 전면적 개각이 이루어짐. 이러한 내각의 변동은 1894년 일본이 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했을 때 일어난 일이 있었음(≪駐韓美國公使館報告≫(Communications to the Secretary of State from U. S. Representatives in Korea, H. N. Allen), 문서번호 152, 1898년 10월 13일, Change of Cabinet, Peaceful Revolution, Independence Club).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1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탐구당,2003, p 353)

10월 15일에 독립협회는 박정양 정부와 회담을 갖고 잡세 혁파와 중추원 관제 개정을 통한 의회 설립을 협의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이러자 고종과 수구파는 곧 저지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구파의 조종을 받은 황국협회 회원들은 16일에 의정서리 박정양의 집에 몰려가서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다 같은 민회인데 어째서 독립협회만 상대하는 것이냐며 항의하고 박정양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10월 17일에 고종은 조병식(1823∼1907)을 의정부 찬정에 임명했다.

조병식은 큰 사건마다 등장하는 인물인데 탐학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는 1876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878년 이조참판이 되었는데, 충청도 관찰사 재임시 탐학하였던 행적이 드러나 전라남도 나주목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왔다.

그는 1883년에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죄인을 함부로 형살(刑殺)시킨다는 죄로 다시 유배되었다.

1888년에는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1888년 7월 13일에 조선국 대표로 러시아의 베베르와 조아육로통상장정(朝俄陸路通商章程)을 체결했다.

1889년에 흉년이 들었다.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1889년 9월 1일에 외아문에 방곡령 실시를 통고하고 1889년 10월 1일부터 원산항을 통해 1년간 콩의 일본수출을 금지시켰다. 외아문은 일본 측에게 방곡령을 9월 17일에 통보하였는데, 일본대리공사 곤도[近藤眞鋤]는 방곡령은 한 달 전에 미리 통보되어야 한다는 점, 당시 콩이 50년 내 대풍이라는 점을 들어 방곡령의 즉각적인 해제를 요구하고 외아문을 압박하였다.

외아문 독판 민종묵은 일본대리공사 곤도의 압력에 못 이겨 10월17일에 함경도관찰사 조병식에게 방곡령을 해제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조병식은 오히려 일본 상인들로부터 곡물을 압수하는 등 방곡령을 더욱 철저히 고수하였다. 이에 곤도는 방곡령 폐지는 물론 조병식의 처벌을 요구하여 결국 조정은 11만 원의 배상금을 일본에게 지불하게 되었고, 조병식은 3개월 감봉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이 조병식을 경질시키기 위해 본국 외무대신에게 군함 파견을 요청하자, 고종은 1890년 윤2월 29일에 부득이 조병식을 강원도 관찰사로 전임시켰다.

이후 조병식은 이조·공조 판서를 거쳐, 경기감사·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1891년 10월에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892년 말에 동학교도들은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에게 분노의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1880년대 중반 이후 충청도에 동학교도가 급속히 늘어나자 각 고을의 수령과 아전 그리고 토호들은 정부의 동학 금지령을 빙자하여 동학교도들의 재산을 마구 수탈하고 탄압하였다. 그 중심에는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이 있었다.

1892년 10월에 동학교도들은 조병식에게 ‘수령의 학정을 중단하고 임금께 최제우의 신원회복 청원서를 올려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조병식은 이를 묵살하였다. 오히려 오히려 동학교도에 대해 탄압을 강화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드디어 동학교도들은 교조신원운동을 본격화하여 1893년 2월에 광화문 복합상소이후 3월 중순에는 보은 집회를 열었다. 보은집회에는 2만 명의 교도가 운집하여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덕수궁 함녕전 (사진=김세곤)
덕수궁 함녕전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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