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10월 17일에 고종은 3년간 귀양 보낸 조병식을 의정부 찬정 (贊政)에 임용했다. 독립협회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10월 20일에 고종은 토론은 정치문제 이외에만 허용하고, 집회는 한 장소에서만 하도록 k하고 이차집회(離次集會: 장소를 옮겨서 집회를 여는 것)를 금지하는 조칙을 내렸다.

“무릇 협회라는 이름 아래 제멋대로 쫓아다니면서 치안을 방해하는 자는 엄격히 금지시키도록 하라.” (고종실록 1898년 10월 20일 1번째 기사)

10월 21일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규탄을 받고 물러난 윤용선을 의정부 의정(議政)에 제수하였고, 독립협회에 비판적이었던 최익현을 의정부 찬정에 임용했다. (고종실록 1898년 10월 21일 1번째 기사)

이는 보수파의 결집이고 독립협회에 대한 견제였다.

이러자 독립협회는 10월 22일부터 정해진 장소인 독립관이 아닌 경무청 앞에서 집회를 열고, 칙명을 위반했으므로 처벌을 받겠다는 뜻으로 철야 농성을 하였다.

아울러 독립협회와 시위군중들은 신임 의정 윤용선의 집 앞에서 시위 집회를 열어 윤용선으로부터 자진 사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0월 23일에 중추원 의관(議官) 윤치호 등이 상소를 올렸다.

"신 등이 어제 조칙을 내린 것을 삼가 읽고서 처음에는 두렵고 떨렸으며 중간에는 근심하고 탄식하다가 마지막에는 분통이 치밀어 올라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중략) 저 배척을 당한 여러 신하들이 아첨을 해서 오로지 폐하의 총명을 가려 버리기를 일삼음으로써 안으로는 민심의 불평을 자아내게 하고 밖으로는 이웃 나라에게 틈을 엿보도록 만들어 행정에는 규정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송사(訟事)를 심리함에는 법률을 지키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2천만의 인구는 굶어 죽어 구덩이를 메울 곤경에 빠지게 되고 삼천 리 강토는 갈가리 찢겨질 근심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 등이 줄을 지어 회의를 열고 밀봉한 상소를 올려 대궐을 지키려 한 뜻은 오로지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배척을 받은 여러 신하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 마땅히 뉘우쳐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규탄을 받은 것만을 원수처럼 여기고 높은 자리로 나가기를 암암리에 꾀하여 교묘한 일을 꾸며 모함해서 신 등에 대하여 나라의 법령을 평론하고 벼슬을 올리거나 내리는 일에 참견하며 대신을 내쫓아 법도를 완전히 무시하였다고 말하면서 기어이 내쫓으려고 제멋대로 방해를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는 이 무리들의 은근한 모함을 그릇되게 믿고서 이런 엄한 조령을 갑자기 내리니 폐하는 어찌하여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고 바른 말을 미워합니까? 이것이 신 등이 통분한 마음이 격절하고 이어 피눈물을 흘리는 까닭입니다.

외국의 실례로 말한다면 현재 허다한 민회(民會)가 있는데 정부의 대신들이 정사를 하는 데서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전국에 알려 민중을 모아서 질문하고 잘못을 따집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승복하지 않으면 감히 물러가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은 외국의 민회(民會)가 어찌 강연과 담화에 그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돌아보건대 우리나라 협회(協會)는 독립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황태자 폐하는 대궐 창고의 재물을 내려주어 돕고 현판을 내려 주어서 그것을 내걸고 있으니 이것은 사설(私設)이 아니고 진실로 공인(公認)된 것입니다.

(중략) 사람들이 말하기를 민권(民權)이 커지면 군권(君權)이 적어진다고 하는데 이보다 더 무식한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민의(民議)가 없다면 오늘 정사와 법률은 그에 따라 허물어져 어떤 재앙의 기미가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 알 수 없을 것인데 유독 폐하만은 어째서 이에 대하여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신 등은 충성스러운 분격이 치밀어서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문득 진술하였는데 다만 더없이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聖明)으로 헤아려서 살펴주소서."

이에 고종이 비답하였다.

"거듭한 말은 나랏일을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신칙하고 타일러도 끝내 물러가지 않음은 마치 명령에 항거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어찌 도리인가?

바른 말이 들어오는 길을 열고 진보를 이룩하도록 충고한 것과 같은 것은 이미 예정한 바 있으니 잘 알고 물러가 기다리며 다시는 시끄럽게 하지 말라." (고종실록 1898년 10월 23일 7번째 기사)

고종의 비답은 독립협회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발언이었다.

덕수궁 중화문 앞 (사진=김세곤)
덕수궁 중화문 앞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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