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덕수궁 중화전
사진 덕수궁 중화전

18981217일에 수구파 민영기 등이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진언함에 따라, 고종은 영국·독일·러시아·미국의 공사들을 불러 의견을 타진하였다.

외국의 공사들은 순검(경찰)을 사용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도록 권고하였다. 황제가 순검의 힘이 약하니 군대로써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킴이 어떠한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이는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바이다라고 말하면서 찬성하지 않았다.

1218일에 일본 공사 가토 마스오가 고종을 단독 면담했다. 고종은 가토에게 군대로 민회를 해산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가토는 일본에서도 유신 초기에 군대로 민회를 제압한 일이 있다고 답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하였다.

일본 공사 가토는 무려 3시간 면담하면서 민회가 처음에는 충군 애국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난민의 부류에 빠져있다고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규탄하였다. 고종은 일본공사 가토의 진언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때 고종은 군대 동원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1218일에도 만민공동회는 수구파 관료들의 추방과 개혁정부 수립을 요구하면서 집회를 계속하였다.

이 날 고종은 민영기를 평안남도 관찰사, 경무사 김영준을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수구파 대신들을 지방으로 내보내는 한편, 의정부 찬정 윤웅렬을 경무사에 겸임시켰다. 윤웅렬은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의 부친 윤웅렬이었다. (고종실록 189812182번째 기사)

1219일 오후 3시에 고종은 한성 소윤과 경무사를 만민공동회에 보내어, 만민공동회가 해산하지 않으면 매우 엄중히 처벌할 것이므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적인 칙어를 내렸다.

1220일에도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계속되었다. 이날 나중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군중들에게 보부상의 주모자는 민영기이니 누구든지 그를 체포하면 은 1,000원을 지급하기로 현상금을 걸자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이 채택되어 민영기에게 은 1,000원의 현상금이 걸렸다. 이 소식을 들은 민영기는 도망쳐 숨었다.

또한 박승목을 총대위원으로 선정해서 고등재판소에 보내어, 보부상 배후 조종자인 전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군부대신 민병석 등 4인을 체포하여 공개 재판에 부칠 것을 요구하였다.

 만민공동회 재개 16일째인 1221일에도 시민들은 고등재판소 문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민영기 등의 체포와 재판을 계속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이 날 조령(詔令)을 내려 박영효 임명을 상소한 이석렬 등을 잡아 진상을 밝히도록 명했다.

"도망간 죄인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법이다. 이제 듣건대, 박영효를 임용하는 문제를 가지고 버젓이 상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이 어찌 신하와 백성으로서 입 밖에 낼 말이겠는가? 너무도 놀랍고 한탄스러워서 차라리 말하고 싶지도 않다. 원래의 상소는 비록 비서원(祕書院)에서 물리쳤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해서 엄격히 징계하지 않으면 법은 시행되지 않고 나라는 나라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법부(法部)로 하여금 경무청(警務廳)에 신칙해서 소두(疏頭) 이석렬(李錫烈) 등 여러 범인들을 염탐하여 체포하도록 한 뒤에, 철저히 조사하여 실정을 캐낸 다음 조율(照律)하여 등문(登聞)하도록 하라.

요즘 기강이 해이해져 국사범(國事犯)들이 번번이 망명을 능사로 여긴 채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고 나라의 체모를 훼손시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생각이 이에 미치고 보니 어찌 통분하고 원망스럽지 않겠는가? 무릇 국외로 도망친 자는 죄의 대소(大小)와 경중(輕重)을 막론하고 또 해당 범인이 수범(首犯)인지 종범(從犯)인지 따질 것 없이 난신적자(亂臣賊子)라는 점에 있어서 매한가지이다.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는 만큼 영원히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희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알아야 할 것이다." (고종실록 189812211번째 기사)

이것은 고종의 강경 대처를 예고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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