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회 이극돈과 김일손의 악연 

탁영 김일손 묘소 (경북 청도군)
탁영 김일손 묘소 (경북 청도군)

1498년 7월 19일에 이극돈(1435∼1503)이 사초와 관련하여 상소하였다. 이극돈의 상소문을  계속하여 읽어보자.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2번째 기사) 

“병오년(1486년, 성종 17년)에 신이 윤필상·유지(柳輊)와 함께 시관이 되어 예조에 있는데, 김일손(1464∽1498)이 거자(擧子 과거를 보는 선비)가 되었습니다. 신은 본래 김일손이 문장에는 능하나 심술이 범람하다는 말을 듣고, 대작(代作)이 있을까 두려워 중장(中場)·종장(終場)의 제술을 모두 월대(月臺) 위에 두고 제술하게 했습니다. 고시하는 날이 되어 한 권의 잘 지은 것이 있었는데 말이 격식에 많이 맞지 않았습니다. 

좌중이 능작(能作)이라 하여 1등을 주고자 하였으나 신은 홀로 말하기를, ‘과장의 제술은 정식(程式)이 있는데, 이 시권(詩卷)이 아무리 능작이라 할지라도 정식에 맞지 아니하니 1등에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더니, 좌중에서 다 그렇게 여기어 마침내 2등에 두었습니다. 

나는 사사로 좌중에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김일손의 제작일 것이다. 이 사람이 본시 격식에 구애받지 아니하니 마땅히 제재하여 중(中)에 가게 해야할 것이다.’하였사온데, 이것이 김일손의 맨 처음 원망을 맺은 곳이었습니다.”

「탁영 선생 연보」에는 “1486년(23세) 10월, 복시 대중흥책(對中興策)으로 제1인으로 합격하고, 전시 친현원간잠(親賢遠奸箴)에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다”라고 적혀 있다. (김일손 지음, 김학곤 ·조동영 옮김, 탁영선생문집, p 689)  

한편 윤근수(1537∼1616)의 『월정만필』에는 ‘김일손의 과거 응시’ 글이 실려 있다.

“탁영(김일손의 호)이 별시에 응시하였을 때 탁영의 두 형 준손(駿孫)과 기손(驥孫)도 탁영의 손을 빌린 덕택에 탁영과 함께 모두 초시에 합격하였다. 전시를 치르는 날, 탁영은 두 형의 책문을 대신 지어주고, 자기 것은 짓지 않았다. 형에게 장원을 양보하고 자기는 훗날 과거에 장원하려고 한 것이었다. 두 형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준손은 갑과 제1인이었다. 훗날 과거를 치를 때 전시의 시관(試官 이극돈)이 속으로 탁영의 문장인 줄 알고서 그 사람됨을 꺼려 2인으로 밀어 두었기에 민첩(閔怗)이 제1인이 되었다. 김일손이 듣고서 성을 내며, “민첩이 어떤 사람이냐?”하였다.”

이리하여 이극돈과 김일손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두 번째 악연은 이극돈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후에 신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김일손이 근친하는 일로 인해 고향에 돌아왔으나 한 번도 대면하지 않았었고, 또 뒤에 신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적에 이·병조낭청들이 다 추천하여 낭청을 삼자고 했는데, 신은 그 사람이 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차 홍문관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핑계대고 망(望)에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이조 낭청이 다시 추천했는데도 신은 역시 불가하다 했었고, 그 후에 병조 당상이 강력히 추천한 후에야 비로소 병조좌랑을 얻었으니, 이것이 제2의 원망을 맺은 곳이요,”

「탁영 선생 연보」를 보니 김일손은 1490년 10월에 사헌부 감찰이 제수되었고, 11월에 진하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다. 1491년 1월 연경에서 예부원외랑 정유를 만나 <소학잡설>을 얻었고, 3월에 중국에서 귀국하여 <소학잡설>을 인쇄 반포하였다. 이때 사간원 정원에 보직되었다. 

8월에 병조좌랑이 제수되었고 이어서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다고 적혀 있다. (김일손 지음, 김학곤 ·조동영 옮김, 탁영선생문집, p 691-692)
  
이어서 이극돈은  김일손과의 세 번째 악연을 말한다. 

“지금 또 그 사초(史草)를 봉하고 일이 발로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제3의 원망을 맺은 곳입니다. 신은 일손과 나이가 너무도 차이가 있을 뿐더러 사는 곳도 서울과 시골이 각각 다른 까닭에 잠깐도 서로 구하는 일이 없었으니, 신이 일손에게 무슨 혐의가 있사오리까. 신이 하는 바는 다 공사로 인한 것입니다.” 

세 번째 악연은 실록청 당상 이극돈이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자신의 비행을 열람한 일이다. 이극돈의 비행은 세조 때 불경을 잘 외운 덕으로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가 상(喪)을 당했는데, 이극돈은 장흥의 관기(官妓)와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었다는 사실이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2일)

그런데 이극돈은 자신의 비행이 『성종실록』에 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세조 때의 궁금비사(宮禁秘事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되는 궁궐의 비밀스런 일)를 유자광에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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