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의 전말 

창덕궁 인정문
창덕궁 인정문

1498년 7월 29일의 ‘연산군일기’를 계속하여 읽어보자. 
 
“1476년에 한명회를 탄핵하여 파직된 유자광은 복직하였는데, 다시 임사홍·박효원 등과 더불어 현석규를 밀어내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동래(東萊)로 귀양 갔다가 석방되어 왔다.” 

1477년 7월에 현석규는 도승지가 되고 홍귀달은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임사홍도 우승지가 되었다. 때마침 조식(趙軾)의 누이동생이 이심에게 시집가서 일찍이 과부가 되자 조식은 그의 노비까지 모두 빼앗았다. 이후 조식의 누이동생이 전 현령 김주(金澍)와 혼인하였는데 조식은 이를 강간으로 김주를 무고하였다. 의금부는 조식을 무고죄로 신문하기를 청했는데, 홍귀달이 조식을 심문하는 것이 부당함을 성종에게 아뢰었다. 

형방 승지인 현석규가 다음 날 출근하여 자신과 의논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임금에게 아뢴 것에 노하여 소매를 걷어 올리며 ‘너’라고까지 하면서 홍귀달을 꾸짖었다. 이러자 대사간 손비장과 사간 박효원이 현석규의 행동을 비난했고, 임사홍과 현석규 간에 말다툼이 있었다. 유자광 또한 소를 올려 현석규를 탄핵하여 사건이 커졌다. 

이에 성종은 무마책으로 임사홍을 대사간에, 현석규를 형조 판서에 임명했다. 하지만 지평 김언신은 현석규를 소인이라 하였고 이후 유자광의 상소가 잇달았다. 하지만 현석규를 옹호한 성종은 1478년 5월 8일에  임사홍을 의주에, 유자광을 동래에, 박효원을 부령에, 김언신을 강계에 유배(流配) 보냈다. 한명회와 현석규 사건으로 보건대, 유자광은 무고의 달인이었다.    

‘연산군일기’를 계속 읽어보자.  
 
“그러나 성종은 유자광이 국정을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다만 훈봉(勳封)만 회복시킬 뿐 일찍이 일을 다스리는 소임을 제수하지 아니하니, 유자광은 은택을 엿보고 못하는 바가 없이 꾀를 부렸는데도 마침내 팔리지 않으니 항상 불만을 품었었다. 그러던 중, 이극돈 형제가 조정에서 권세를 잡는 것을 보고 그가 족히 자기 일을 성취시킬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문득 몸을 기울여 아부하여 서로 결탁하였다.

일찍이 함양(咸陽) 고을에 노닐면서 시(詩)를 지어 군재(郡宰 군수)에게 부탁하여 판자에 새겨 벽에 걸게 하였는데, 그후 김종직이 이 고을 원님이 되어 와서 말하기를, ‘유자광이 무엇이기에 감히 현판을 한단 말이냐’ 하고, 즉시 명하여 철거하여 불사르게 하였다. 유자광은 성나고 미워서 이를 갈았으나, 김종직이 임금의 총애를 받아 한창 융성하므로 도리어 스스로 납교(納交)를 하고 종직이 졸(卒)하니 만사를 지어 통곡했으며, 심지어는 왕통(王通)·한유(韓愈)에게 비하기까지 하였다.

김일손이 일찍이 김종직에게 수업하였는데, 헌납(獻納)이 되자 말하기를 좋아하여 권귀(權貴)를 기피하지 아니하고, 상소하여 이극돈과 성준이 서로 경알(傾軋 간책을 써서 모함함.)하여 장차 파당을 이루려 한다고 논하니, 이극돈은 크게 노하였다. 

급기야 성종이 승하하자 실록청이 설치되어 이극돈이 당상(堂上)이 되었는데,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보니 자기의 악한 것을 매우 자상히 썼고 또 세조조의 일을 썼으므로, 이로 인하여 자기 원망을 갚으려고 하였다. 하루는 사람을 물리치고 총제관(摠制官) 어세겸에게 말하기를, ‘일손이 선왕을 무훼(誣毁)하였는데, 신하가 이러한 일을 보고 상께 주달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나는 그 사초를 봉하여 아뢰어서 상의 처분을 듣는 것이 우리에게 후환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니, 어세겸이 깜짝 놀라서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오래 있다가 유자광에게 상의하니, 자광은 팔을 내두르며 말하기를, ‘이 어찌 머뭇거릴 일입니까.’ 하고, 즉시 노사신·윤필상·한치형을 가서 보고 먼저 세조께 은혜를 받았으니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하여, 그 마음을 감동시킨 뒤에 그 일을 말하였으니, 대개 노사신·윤필상은 세조의 총신(寵臣)이요, 한치형은 궁액(宮掖)과 연줄이 닿으므로 반드시 자기를 따를 것으로 요량하여 말한 것인데, 과연 세 사람이 모두 따랐다. 

그래서 차비문(差備門) 안에 나아가 도승지 신수근을 불러내어 귀에다 대고 한참 동안 말한 뒤에 이어서 아뢴 것이다.

처음에 신수근이 승지가 될 적에 대간과 시종이 ‘외척이 권세를 얻을 조짐이다.’고 해서 강력히 불가함을 아뢰었으므로, 수근 이 원망을 품고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정이 문신(文臣)들의 손안의 물건이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느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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