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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6회)- 유성원, 집에서 자결하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3.0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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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니스트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이제 1456년 6월2일 자 세조실록의 마지막 부분을 보자.

밤이 깊어지자 세조는 이들을 모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박원형·좌참찬 강맹경·좌찬성 윤사로·병조판서 신숙주·형조판서 박중손 등에게 명하여 의금부 제조(提調) 파평군 윤암·호조판서 이인손·이조 참판 어효첨과 대간(臺諫) 등과 함께 같이 국문하게 하였다. 유성원은 집에 있다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김질과 정창손의 밀고로 세조는 하루 종일 사정전에서 친국했다. 실록에 ‘밤이 깊어지자’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친국은 밤늦게까지 행해졌다.

밤늦게 성삼문 · 박팽년 등은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의금부는 지금의 종각 전철역 1번 출구 앞이다. 그곳에 ‘의금부 터’ 표시석이 있다.

사진=의금부 터 표시 석

세조는 도승지 박원형· 병조판서 신숙주· 형조판서 박중손 등에게 명하여 의금부 제조 윤암·호조판서 이인손·이조 참판 어효첨과 대간(臺諫) 등과 함께 같이 국문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성삼문 등을 국문하는 관료 중에 병조판서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신숙주는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등 집현전 학사들과 친구였지만, 그들을 국문하는 추국관(推鞫官 죄인에게 형장을 가하면서 죄과를 추문하는 관리)의 처지가 된 것이다. 이런 것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는 것일까. 1)

한편 충북 음성군 출신인 성균 사예 유성원(柳誠源)은 집에 있다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유성원은 계유년(1453년)에 백관들이 수양대군의 공로를 중국 주나라 개국공신인 주공(周公)에 견주며 포상하기를 청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조서의 초고를 짓도록 하였다. 여러 학사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유독 유성원만 남아 있다가 협박을 당하여 초고를 지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통곡했으나 집안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단종 복위 거사가 발각되었을 때 유성원은 마침 성균관에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그에게 성삼문의 체포 사실을 알리자, 유성원은 즉시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더불어 술을 따라 이별주로 마시고 사당에 올라가서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아내가 가서 보니 관대(冠帶)도 벗지 않은 채 패도(佩刀)를 뽑아 스스로 목을 찌르고 죽어 있었다. 조금 있으니 나졸들이 시체를 가지고 갔다.

김천택이 1728년(영조 4)에 엮은 『청구영언』과 1876년(고종 13)에 박효관과 박민영이 편찬한 『가곡원류』에는 유성원의 「사육신 충의가(忠義歌)」가 실려 있다.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더니
문전의 수성어적(數聲漁笛)이 잠든 나를 깨워라

사진=사육신 공원의 ‘사육신 역사관’에 있는 유성원 상

한편 6월3일에 세조는 "역모에 연좌(緣坐)된 자는 서울에서는 의금부에, 외방(外方)에서는 소재한 고을에 가두고, 수령은 다른 고을에 가두게 하라."고 명했다. (세조실록 1456년 6월3일)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말이 있다. 반역죄는 친족 ·처족 · 외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다는 뜻이다. 역모에 연좌되어 성삼문의 동생 성삼고 · 성삼성이 잡혀왔다. 박팽년의 아우 수찬 기년(耆年), 교리 인년(引年), 박사 대년(大年), 정랑 영년(永年), 아들 박헌도 잡혀왔고, 이개의 아들 이공회, 사촌동생 이유기, 하위지의 동생 하기지 · 하소지, 유성원의 아들 유귀련과 유공련, 김문기의 아들 김현석, 송석동의 아들 송창· 송녕 ·송안도 잡혀왔다. 2)

하지만 세조는 역모에 연좌된 함길도(咸吉道) 온성절제사 유사지(柳士枝)는 특별히 용서했다. 세조는 유시(諭示)하기를, "너의 조카 유성원이 몸소 대역을 범하였으니, 법으로 당연히 연좌되는 것이나 너의 몸가짐이 청렴 · 정직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군인을 어루만져 현저한 공적이 있으므로, 특별히 너를 용서하여 옛 직책에 그대로 있게 한다. 백성을 다스리고 방어하는 일 등에 더욱더 힘써 나의 뜻에 부응하게 하라." 했다. (세조실록 1456년 6월3일)

1)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성삼문과 신숙주는 라이벌이다. 매죽헌 성삼문은 그의 호처럼 절개의 표본으로 추앙을 받아 왔고, 세조의 남자 신숙주는 변절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숙주는 학자 · 정치가이고, 일본 사신으로 갔다 온 책 『해동제국기』를 남기기도 한 유능한 외교관으로서, 세조는 그를 당나라 태종 때 명신 위징(魏徵, 580∼643)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숙주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무시하고 단종 대신 세조를 섬겼기 때문에 숙종이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사육신을 현창한 1691년 이후에는 변절자가 되고 말았다.

백성들 또한 신숙주를 미워하여 ‘녹두 나물’을 ‘숙주나물’로 불렀다. 녹두 나물은 녹두의 싹을 내어 먹는 나물이다. 그런데 사육신의 충절이 현창되자 신숙주는 부정적 평가를 받고 말았다. 이리하여 19세기 이후 녹두 나물이 맛이 쉬 변하는 특성이 신숙주의 변절한 모습과 같다고 하여 ‘숙주나물’로 불렀다는 것이다. (박은봉 지음, 한국사 상식 바로 잡기, 책과 함께, 2007, p 143-145)

숙주나물에 대한 다른 설은 백성들이 신숙주를 미워하여 이 나물을 숙주나물로 불렀는데, 그것은 숙주나물로 만두소를 만들 때 짓이겨서 하기 때문에 신숙주를 이 나물 짓이기듯이 하라는 뜻이 담겨있단다. (출처 :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연좌된 이들은 ‘장릉(단종 능) 배식단 별단’ 배향 236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지두환, 단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 p 378-384)

김세곤 칼럼니스트  segon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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