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칼럼니스트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추국관 신숙주는 세조에게 박팽년 · 하위지 등의 회유에 실패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세조는 격분했다. 그는 당장 성삼문 · 박팽년 등을 당장 불러오라고 하고 사정전에서 다시 친국했다.

세조는 먼저 성삼문부터 국문했다. 세조는 “그대는 나의 녹(祿)을 먹지 않았던가. 녹을 먹으면서 배반하는 것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명분으로는 상왕(단종)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신을 위하려는 것이다.”라고 추궁했다.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상왕이 계시거늘 나리가 어찌 저를 신하라고 하겠습니까. 또한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저의 가산(家産)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 하였다. 1)

세조가 매우 노하여 쇠를 달구어 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자르도록 했으나, 안색이 전혀 변하지 않고 천천히 말하기를 “나리의 형벌이 혹독하기도 합니다.” 하였다.

그때, 신숙주가 세조 앞에 있었다. 성삼문이 신숙주를 꾸짖기를 “옛날에나와 자네가 집현전에 있을 때에 세종께서 날마다 왕손(王孫)을 안고서 뜰을 거닐면서 여러 유신(儒臣)에게 말씀하시기를 ‘과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 경들은 부디 이 아이를 보호하라.’ 하셨네.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거늘 자네는 이를 잊었단 말인가. 자네의 악행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 하였다. 이러자 세조가 신숙주더러 “뒤편으로 피하라.” 하였다. 2)

한편 제학(提學) 강희안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강희안은 고문을 당해도 자복하지 않았다. 임금이 묻기를 “강희안도 함께 모의했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강희안은 실로 알지 못합니다. 나리가 명사(名士)를 모두 죽이시니, 의당 이 사람을 남겨 두었다가 쓰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로써 강희안은 모면할 수 있었다. 3)

다음에 세조는 박팽년을 국문했다. 박팽년은 세조를 일컬을 때에 반드시 ‘나리(進賜)’라고 불렀다. 세조가 크게 노하여 그 입을 닥치도록 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나에게 신하라고 일컬었으니, 지금 비록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하니, 대답하기를, “저는 상왕의 신하이니, 어찌 나리의 신하가 되겠습니까. 일찍이 충청 감사로 있던 1년 동안에 무릇 장계와 문서에 일찍이 신(臣)이라고 일컬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사람을 시켜 그 장계를 살펴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고 모두 ‘거(巨)’ 자였고, 녹봉은 먹지 않고 창고에 봉하여 두었다.

박팽년이 옥중에서 죽자(세조실록 1456년 6월7일), 세조가 일컫기를, “박팽년 등은 당세의 난신(亂臣)이요, 후세의 충신(忠臣)이다.” 하였다. 4)

사육신 공원에 있는 박팽년 묘

이어서 세조는 하위지(河緯地)를 추국하였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이미 저에게 반역의 이름을 더하였으니 그 죄는 응당 죽이는 것이거늘 다시 무엇을 묻겠습니까.” 하니, 임금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 작형을 시행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과묵하며 도리에 어긋난 말이 없었다. 세종이 인재를 배양한 것이 문종 때에 이르러 바야흐로 성대하였다. 당시의 인물을 논한다면 하위지를 으뜸으로 꼽았다. 5)

사육신 공원에 있는 하위지 묘

이개(李塏)도 작형(灼刑)을 당했다. 그는 천천히 말하기를 “이것은 무슨 형벌인가?” 하였다. 그는 야위고 약했으나 엄한 형벌 아래서도 낯빛이 변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6월6일에 세조는 "집현전(集賢殿)을 파하고, 경연(經筵)을 정지하며, 거기에 소장(所藏)하였던 서책(書冊)은 모두 예문관(藝文館)에서 관장하게 하라."고 명했다. (세조실록 1456년 6월6일)

세조는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거사의 중심이었기에 집현전을 불온 세력의 온상으로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세조는 1420년에 세종이 설치한 학문연구기관 집현전을 37년 만에 폐지시켰다. 6)

경연도 정지되었다. 임금과 신하가 모여 정치와 학문을 강론하는 자리도 없앤 것이다. 세조의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경복궁 수정전 - 집현전이 있었던 자리이다.
경복궁 수정전 - 집현전이 있었던 자리이다.

 

1) 실제로 성삼문을 처형하고 난 뒤에 집에 가서 확인 해보니 세조 즉위 후에 받았던 녹봉은 그대로 쌓아 놓고, 방에는 거적만 깔려 있었다.

이에 관한 성삼문의 시조도 전해진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주글진들 채미도 하는 것가.

비록애 푸새앳 거신들 긔 뉘 땅헤 낫다니

수양산(수양대군)을 바라보며 백이와 숙제를 꾸짖으며 한탄하노라.

굶주려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뜯어먹어서야 되겠는가.

비록 산에 자라는 풀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누구의 땅에서 난 것인가.

2),3)과 5)

이 내용들은 남효온의 추강집 제8권 / 속록(續錄) ○전(傳) 육신전(六臣傳)에 수록되어 있다.

4) 1799년에 편찬된 정조의 시문집 ‘홍재전서 제60권 / 잡저(雜著)7, 장릉 배식단에 배향된 정단(正壇)의 인물’의 박팽년에 실려 있다.

6) 성종 때에 집현전의 후신으로 홍문관(弘文館)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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