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12월 25일에 황태자가 정청(庭請)하여 세 번째로 아뢰었다."신자(臣子)의 간절한 마음은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어서 윤허 받지 않고서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중략) 바라건대 여러 사람들의 청을 특별히 허락하고 예원(禮院)으로 하여금 예법대로 거행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추위를 무릅쓰고 간절히 청하는 효성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따른다. 그러나 연회에 대하여 말하면 지금 백성들이 처한 처지에서 헤아리면 짐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내년
1901년 (고종 38년) 12월 11일에 황태자(나중에 순종)가 상소하여 동짓날에 축하문을 올리겠다고 청했다. "내년은 바로 우리 부황 폐하(1852∽1919 재위:1863-1907)의 나이가 51세가 되고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경사스러운 해입니다.(중략) 소자가 동짓날에 모든 관리들을 거느리고 축하를 올리도록 허락함으로써 하찮은 성의나마 조금이라도 펼 수 있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이에 고종은 특별히 윤허하였다. "너의 상소를 보고 너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대체로 경사(慶事)라고 하는 것은 길(吉)한 일로서,
# 민영환의 어리석음 1901년에도 매관매직의 풍조가 1894년 갑오개혁 이전보다 훨씬 더 심했다. 아무리 종친이나 외척 혹은 임금과 가까운 자라도 감히 한 자리도 은택(恩澤)으로 얻을 수 없었다, 관찰사 자리는 10만 냥 내지 20만 냥이었고, 일등 수령 자리도 5만 냥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서상욱은 민영환의 외삼촌이다. 민영환은 고종에게 군수 자리를 달라고 오래전에 아뢰었는데, 고종은 “너의 외숙이 아직까지 군수 한자리 하지 못했단 말이냐?”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에 민영환이 다시 외삼촌 일을 아뢰자 고종은 고개를
1899년 3월 25일에 주한프랑스공사 드 플랑시가 델카세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공문을 보냈다. “지난 1월 이래로 대한제국의 군주는 만일 국가의 이익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선택할 개혁과 혁신의 길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의심과 주저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군주가 임명하는 대신들은 관직을 수행하기가 무섭게 사임하며 이 짧은 기간 동안 여덟 개 부처 책임자들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플랑시는 대한제국의 개혁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고종의 의심과 주저함 잦
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이 탄생하였다. 고종 황제는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하였고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 개혁의 원칙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하되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였다. 그런데 매관매직은 여전했다.먼저 일본 도쿄에 주재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교관이 1898년 1월 11일에 수집한 조선의 정세에 대하여 살펴보자. (한국에는 주재관이 없었다.)“이 나라의 한탄스러운 상황은 무엇보다도 비양심적이고 부패한 관료 계층에 그 원인이 있다. 정부로부터 봉급을 받지 못하거나 기껏해야 보잘 것 없는 곡물
1898년 12월 25일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킨 고종은 12월 28일에 조령(詔令)을 내려 백성들에게 생업에 안착할 것을 명했다. “오늘부터 의구심을 말끔히 풀고 각자 돌아가 생업에 안착하라. 만일 다시 뜬소문을 퍼뜨리면서 혼미하여 되돌아갈 줄 모르고 열 명, 다섯 명씩 떼를 지어 이전의 버릇을 되풀이할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바로 스스로 죄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윽고 고종은 독립협회 지회도 해산시켰다. 1899년 1월 15일에 고종은 지방관과 진위대로 하여금 독립협회 지회를 엄금하도록 재차 명령하였다.아울러 고
1498년 7월 19일에 이극돈은 상소를 계속했다. “대개 일의 시말(始末)이 이러하온데 7월 14일에, 9일에 열어본 이유를 추문(推問)하므로 신은 진술하려 하였으나 국가의 비사(秘事)를 공청(公廳)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하기 때문에, 다만 의금부에서 와서 고(告)한 사유만 납초(納招)하였는데, 지금 신더러 ‘장차 고초를 겪을 것을 알고 그랬다.’고 하교하시니, 감히 모두를 진달하는 것이옵니다. 신이 실지로 노사신·한치형과 함께 아뢰기를 의논하였는데, 또 무엇이 의구(疑懼)스러워서 장차 고초를 겪을 것을 염려하였겠습니까. 또 하
1898년 12월 23일에 고종은 마침내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시위대(侍衛隊) 제2대대 대대장 김명제는 부하 병정들에게 각 3원씩 나누어 주고 술을 마시게 한 다음 만민공동회를 해산토록 명령했다. 술 취한 시위대 병정들은 일제히 만민을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만민들이 흩어지자, 시위대 병정들은 만민들을 총검으로 위협하며 추격하였고, 그 뒤에는 보부상들이 뒤따라오면서 “민회를 밟아라” “회원 연설자를 잡아라” “쳐라” “쫓아라” 등 고함소리를 내며 위협 하여 기세가 살벌하였다. 만민들은 시위
1898년 12월 17일에 수구파 민영기 등이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진언함에 따라, 고종은 영국·독일·러시아·미국의 공사들을 불러 의견을 타진하였다.외국의 공사들은 순검(경찰)을 사용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도록 권고하였다. 황제가 순검의 힘이 약하니 군대로써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킴이 어떠한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이는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바이다”라고 말하면서 찬성하지 않았다. 12월 18일에 일본 공사 가토 마스오가 고종을 단독 면담했다. 고종은 가토에게 “군대로 민회를 해산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1898년 12월 14일에 만민공동회는 광화문 앞에서 만민들을 폭행하려고 침투한 보부상 간부 4명을 잡아 추궁하였다. 이들은 ① 윤치호·고영근· 이상재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 ② 서울 시내 주요 보부상 도소 3곳에 보부상 및 몽둥이 꾼 수백 명을 매복시켰다는 것, ③ 보부상의 경비 19만 냥이 고종의 내탕금에서 공급되었다는 것, ④만민공동회를 공격하기 위해 백민회(白民會)가 조직되었는데 자금 2,000원을 탁지부 대신 민영기가 조달했다는 것 등을 자백하였다.12월 16일에 만민공동회는 보부상 간부 4명을 경무사에게 인도하여
1498년 7월 19일에 이극돈이 상소하였다. 상소문을 계속 읽어보자.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2번째 기사) “그 후에 한치형이 그에 대해 처치할 일을 문의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실록》에는 실릴 리는 만무하지만, 그 원본 사초(史草)는 으레 춘추관(春秋館)에 수장되어 만세에 전하는 데(傳之萬世), 이 어찌 작은 일 이겠는가?(此豈小事) 무릇 사초는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만약 계달(啓達)하지 아니하면 버릴 수가 없으므로 본청에서 함께 의논한 후에 계달할 것을 이미 의정(議定)했다.’고 하니, 한치형도
1898년 12월 1일(음력 10월 8일)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김덕구의 장례를 만민장(萬民葬)으로 거행했다. 김덕구는 11월 21일에 마포에서 보부상과 맨주먹으로 투쟁하다가 죽은 신기료장수(구두 수선공)였다. 만민공동회 회원들은 수만 명이 모여 김덕구의 초빈처인 숭례문 밖 쌍용정에서 입관한 다음, 장례식장인 숭례문 밖 연지(蓮池)로 운구하였다. 장례식은 오후 1시부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시민들과 외국인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만민장 광경을 지켜보았다. 김덕구 만민장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구경한 시민들은 지지세력이 되었고, 황국협
1898년 11월 26일 오후 1시에 고종은 경운궁 돈례문(남문) 군막에 친히 납시었다. 이 자리에는 각부 대신 및 외국 공사·영사와 그 부인들이 좌우에 정렬하였다.오후 2시 30분이 되자 내부대신서리가 만민공동회측 대표를 불렀다. 200명의 대표는 그를 따라 고종이 친림한 탑전으로 들어갔다. 대표들을 면담한 고종은 만민들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겠다고 친히 하교하였다.이어서 고종은 농상공부대신 권재형을 통하여 칙어를 전달했다. 고종은 칙어에서 ①군신 상하가 신의(信義)를 지키며, ②현명하고 능력있는 이를 전국 안에서 구하고, ③아
1498년 7월 19일에 무오사화를 일으킨 이극돈이 상소하였다. 상소문을 읽어보자.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2번째 기사) “지난날에 신이 한치형과 더불어 의정부에 함께 있었는데, 한치형이 가만히 신에게 말하기를 ‘김일손의 사초는 세조 조의 중대한 사실을 썼다 하는데, 사실인가?’ 하므로, 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여 소릉(昭陵) 복구에 대한 일을 대답하니, 한치형은 신이 반드시 알지 못하는 것이라 여기고 다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치형(1434~1502)은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1437~1504)의 인척이었다. 14
만민공동회 제18일째인 1898년 11월 22일, 이른 아침부터 더욱 많은 시민들이 종로에 모여들었다. 학생들도 휴학하여 수만 명의 대규모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군인들도 일부 고급장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만민공동회를 지지했고, 심지어 경무청의 순검들까지도 만민공동회를 지지하고 정부를 비판하였다.이때 마포에 사는 한 시민이 만민공동회에 달려와서 마포에 둔을 치고 있는 보부상의 행패가 크다고 보고하였다. 분격한 일부 시민들은 빈손으로 마포로 달려갔다. 그런데 무장한 보부상들을 이길 수 없었다. 시민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보부상들은
1898년 11월 20일에 보부상들은 의기양양하여 그들의 영수인 과천군수 길영수를 호위하면서 종로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행렬이 종로에 도착하자 길영수는 장군처럼 정좌하였고 보부상들이 물푸레나무 몽둥이를 좌우에 나열하여 위세 당당하였다.이 날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인화문 앞에는 만민공동회가 농성하고, 종로에서는 황국협회의 시위가 벌어져 위기가 고조되었다. 각국 공사관들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대비하기에 급급하였다.마침내 11월 21일 새벽에 보부상들이 만민공동회 농성장을 습격했다. 종로에서 집회를 연 보부상들은 홍종우가 등단
1498년 7월 18일에 유자광(1439~1512)이 실록청(實錄廳)에서 초한 사초(史草)에 누락이 있는가 의심하여 다시 수검(搜檢)할 것을 연산군에게 청했다. 이러자 「성종실록」 편찬 시 감관사(監館事)로 참여한 성준은 "이는 우리들이 모르는 바이다. 무릇 사람들이 입계(入啓)하는 일에 있어서 이와 같이 독차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였다.대사헌 강귀손도 또한 불가하다 말하니, 유자광이 드디어 정지하였다.이윽고 강귀손이 남곤으로 하여금 좌중에서 말하게 하였다.“지금 국옥(鞫獄)에는 위관(委官)이 있고 의금부도 있지만 일찍
1498년(연산군 4) 7월 18일의 이원의 공초는 이어진다.“신이 봉상시 참봉(參奉)이 되어 김종직의 시호를 의론하기를 ‘김종직은 천자(天資)가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온량(溫良)하고 자애(慈愛)하였고, 일찍이 시례(詩禮)를 배워 자신이 이 도를 책임하여 덕에 의거하고 인(仁)에 의지하고, 충신하고 독경(篤敬)하여 사람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자기 직책을 삼았다. 그 학문을 하는 데는 왕도를 귀히 여기고 패도를 천히 여겼고, 그 일에 임해서는 지극히 간략하여 번거함을 제거하였고, 그 사람을 가르
1898년 11월 10일 만민공동회는 이상재 등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의 석방에 성공했다.고종은 조병식과 민종묵을 해임하고, 유기환을 주일공사로 보냈지만, 만민공동회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익명서를 조작한 조병식 등을 재판에 회부할 것을 결의하고, 장소를 종로로 옮겨 집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11월 11일에 서울 시민들과 독립협회·만민공동회 회원들은 종로(운종가)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었다.고종과 정부 측은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석방하면 만민공동회가 해산되리라고 생각했다가, 만민공동회가 여전히 시위를 계속하며 익명서 조작에 간여한
만민공동회 2일째인 1898년 11월 6일에는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모두 철시하고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였고 시민들은 경무청 문 앞에서 철야했다.11월 7일 아침 6시경에 경무청은 이상재 등 17명을 고등재판소로 이송하였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고등재판소 앞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이날 외부대신 민종묵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는 것에 양해를 구하기 위해 각국 공사관을 순방하였다. 그런데 영국 총영사와 미국 공사가 군대 동원에 우려를 표명했다.한편 만민공동회는 고등재판소장에게 이상재 등 17명의 재판은 공개재판으로 할 것